삶의 지혜
틱낫한 지음, 정윤희 옮김 / 성안당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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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는것이 잘 사는걸까.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내면의 준칙을 바로세우는 일이다.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다듬어 나갈 것인가. 나의 역사를 어떤 기록으로 채워나갈 것인가. 어떻게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나는 요즘 그 준칙을 돌아보며 다듬어나가고 있다.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으려 했고 그것을 했을 때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을수도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었다. 즐거움을 느껴도 됐었다. 비합리적 준칙을 걷어참으로써 나는 해방감에 한 걸음 다가섰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하려고 했고 그것을 하지 못했을 때 무력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을수도 있었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됐었다. 괜찮아도 됐었다. 비합리적 당위를 내려놓음으로써 나는 자유로움에 한 걸음 다가섰다. 그 모든 과정에서 거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심리학, 철학, 종교, 인문학, 인지과학, 문학 등 위대한 학자와 영성가와 예술가들이 나에게 올라설 어깨를 제공했다. 넓은 시야와 귀한 지혜를 선물했다. 그 과정에서 오늘도 반가운 거인을 만났다. <화>로 유명한 틱낫한 스님이다.

So-Hyang - 디즈니 모아나-“How Far I’ll Go”(언젠가 떠날거야) -소향

틱낫한 스님이 전하는 '일곱 가지 삶의 지혜'
이 책 <삶의 지혜>는 저자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책이다. 부처의 가르침과 저자의 지혜를 모아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세심한 방향성을 풀어낸다. 7가지 명상주제가 그 핵심이다. 우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세 가지 잘못된 관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세 가지 수련 방법을 소개한다. '공', '무상', '무원'이 그것이다. 이는 불교교리에서 항상 등장하며 삼해탈문으로도 알려져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여기에 네 가지 집중 수련을 덧붙인다. '무상', '무욕', '내려놓음', '열반'이 그것이다. 앞서의 세 가지에 집중함으로써 평온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나아가 마지막 주제인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7가지 주제를 거치며 저자는 '나', '자아', '우리', '몸', '관계', '꿈', '고통' 등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며 삶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불교에 대해, 특히 남방불교에 대해 배움을 확장할 수 있었고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삶의 본질'들을 짚어보며 발견할 수 있었던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우리, 어울려 존재함
26 '존재함'이란 언제나 '어울려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만약 '존재함(to be)'이라는 동사에 접두어 'inter(안에서)'를 더하면 '어울려 존재함(inter-be)'이라는 새로운 동사를 얻게 되지요. 따라서 '어울려 존재함'은 현실을 더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인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것들과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어울려 존재하고 있습니다. ... 인간은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어울려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통해서 더욱 명확한 실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늘에 떠 있는 별도 구름도 꽃도 나무도 여러분도 또 저 역시 그렇습니다.

1장의 '공'을 다룬 챕터에 담긴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공'은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 따라서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닌 가변적인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공'에서 '어울려 존재함'이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오늘의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해준 모든 조건들 중 하나라도 달라졌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내 몸 안의 미세 유기체들이 공존하지 않는다면 나의 몸은 건강하게 기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선조들이 없었다면, 나의 부모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거나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나 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고 사물과 자연과 우주가 그렇다. 

I am Moana (Korean) Subs + Trans

영화 <모아나>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모아나가 뱃머리에서 '나는 모아나!'를 외치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친구 마우이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며 좌절하던 모아나는, 자신의 사명이 담긴 보석인 '테피티의 심장'을 포기한다. 하지만 곧 가오리로 환생한 할머니가 나타나 모아나를 위로한다. "세상이 앞길을 막고 아픔도 남기지만, 상처는 아물고 길이 열릴거야", "배움은 널 인도하고 사랑은 널 강하게 해"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넌 과연 누구일까?." 이 때 스스로를 향한 모아나의 깨달음이 시작된다. "나는 바다와 섬을 사랑하는 소녀", "자랑스런 족장의 딸", "길 찾아 먼 길 떠나 누빈 항해자의 후손" 임을 자각한다. 섬은 안정이며 바다는 무한이다. 섬에서 '안전'한 삶을 누리던 모아나는 '가능성'의 바다로 몸을 던진다. 그렇게 '새로운 섬'에서 '새로운 자신'으로서의 풍요를 누린다. 물론 머지 않은 새로운 항해를 기약하면서 말이다. 동시에 그녀는 자랑스런 족장의 딸이며 항해자의 후손이다. 책임을 나눠가진 집단의 일원이며 조상의 용감한 모험으로부터 존재를 선물받은 수혜자다. 이 모든 '연결감'을, '어울려 존재함'을 하나하나 포용한 후에 비로소, 온 몸으로 포효하며 외친다. '나는 모아나!'라고. 

삶은 자기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나를 자각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데 영감과 영향을 건냈다. 받지 않으려 했으나 받은것도 있고 받으려 했으니 받지 못한것도 있다. 그 모든 과정속에서  배움의 기회가 있었다. 더 돌이켜보면 부모가 있었고 더더 돌이켜보면 조상이 있었으며 더더더 돌이켜보면 자연과 우주가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없거나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지혜가 나에게 묻는다. "넌 과연 누구일까?" 한 가지 분명한 지혜가 떠오른다. 나는 무수한 조건에 따라 형성된 존재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 나를 들여다본다. 자비를 소원하는 약한 존재가 있다. 좋은 것을 주고 싶다. 적어도 '검열'과 '비판'이라는 칼날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다. 주고 싶은 것이 떠오른다. 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것'을 주고 싶어진다.

온 마음을 다하는 삶
120 우리는 한 그루의 편백나무라도 마음을 다해 살펴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매일 일상처럼 지나치는 생활 속에도 수많은 기적들이 가득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매일 출근하는 길에 마주치는 편백나무는 어떠한가요? 그런 사소한 것조차 놓치고 살면서 어떻게 사랑하는 이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태로 어떻게 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목표가 있었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을 이뤄내지 못한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목표를 이룸으로써 비로소 떳떳한 나로 완성될 수 있음을 믿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긴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음이 오로지 미래에 가 있었으니, 그 때의 '오늘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삶을 눈 앞에서 놓쳤다. '알아차리는 삶'의 참맛을 알아가는 요즘이다. 알아차림과 함께하는 삶은 맛있다. 달콤하다. 잘못먹은 독약을 뱉어낼 수 있다. 우리는 때로 독약을 먹는다. 과거의 후회, 미래의 불안, 원망과 미움같은 두 번째 화살이 그것이다. 알아차림은 '이들이 나에게 이롭지 않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때로 약을 먹는다. 기쁨, 감사, 사랑, 안전감을 주는 것들이 그것이다. 알아차림은 '이들이 나에게 이로움'을 알려준다. 그렇게 알아차림은 나를 돌봐주며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모든 것이 기적이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또렷이 깨어서,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순간의 기적들을 예민하게 발견할 수 있기를, 반가운 안녕을 건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삶을 이끌어갈 '나의 뜻'
141 이처럼 행복을 고양시키고 고통을 변화시키고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하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나아가 현실에 완전히 충실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면 바로 그것이 신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굴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활력이 가득한 연민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니까요. 이는 신의 뜻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뜻이기도 합니다.

해탈의 세 번째 관문인 '무원'챕터에 담긴 이야기다. 무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눈 앞에 놓인 무언가를 쫓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안에서 행복과 자유를 찾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눈 앞의 목표가 아닌 무엇을 지향하며 우리는 살아가야 할까? 우리를 인도하는 '신의 뜻'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저자는 말한다. 신의 뜻은 곧 자연의 섭리라고. 언제나 아름답고 용서하고 수용하는 대지의 모습이라고.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고양시키고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바로 신의 뜻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나는 모아나'를 외친 모아나는 바다로 뛰어든다. 그리고 포기했던 테피티의 심장을 움켜쥔채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낡은 배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망가진 갑판을 수리하고 돛을 꿰맨다. 물의 흐름을 통해 '현재의 경로'를 검토하고 별자리를 응시하며 '나아갈 길'을 떠올린다. 그리고 말한다. "저 푸른 바다를 건너가서 , 테피티의 심장을 되돌려놓을거다"라고. 이 말은 모아나가 처음 항해를 시작할 때 주문처럼 외웠던 미션의 변형이다. 처음은 이렇다. "넌, 저 넓은 바다를 건너가서, 테피티의 심장을 되돌려놓아야 한다." Should는 Will이 되었고, You 는 I가 되었다. '당위'는 '의지'가 되었고, '너의 일'은 '나의 일'이 되었다. 건너가야 할 고난의 망망대해는 푸른 빛의 '길'이 되었다. 지금 여기의 자신을 자각한 순간간 목표를 납득하며 수용하게 되었고, 순수한 자발적 의지로 바다를 향해 뛰어들게 된 것이다.

'신의 뜻'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확신할 수 있는 자신감은 없는 주제에 의심은 많아서, 하나의 '경전'을 믿지는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말에 '납득'했다. 나의 행복을 고양시키고 고통을 변화시키며,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일. 그보다 나를 기쁘게 만드는 일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신의 뜻'일 가능성도 열어둔채로 말이다.

Who you truly are
210 고통을 겪어내는 기술을 배우면  덜 고통받을 수 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진흙을 통해 사랑과 이해심의 연꽃을 키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고득락.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에 이르는 것.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길일 것이다. 손톱 밑의 가시가 빠졌을 때의 느낌은 정말이지 상쾌하고 후련하다. 그러니 고통의 상황은 일단 극소화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으로 보인다. 또한 나에게 고통을 준 과거의 사건들 또한 후회스럽거나 원망스러운 느낌이 담긴 기억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할까?

212 어쩌면 우리는 온갖 프로젝트와 일 그리고 바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매인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언가에 대한 집착 혹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슬픔과 분노, 두려움이라는 틀에 갇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평생을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밧줄에 묶인 채로 살아왔을 수도 있고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원한의 무게 속에 짓눌려 있을 수도 있고요.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미처 풀지 못한 오해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지위나 돈, 감각적 쾌락의 노예로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이런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지금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행복과 평화 그리고 자유를 느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더할나위 없겠다. 하지만 고통은 필연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것은 '고통을 어떻게 겪어낼 것인가'이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그 첫걸음은 고통을 마주보는 것이다. 흔히 사람을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나 남에게 숨기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억눌린 것은 결국 폭발하기 마련이다. 해소되지 못한 응어리는 삶의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반드시 고개를 내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용감하게 눈 앞의 고통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명상가는 예술가이자 전사입니다
p.211

응시는 이내 수용으로 이어진다. 명상가는 전사다. 두려움과 수치심과 불안함을 눈 앞으로 가져오며 온전히 깨어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나와 결합된 실체가 아님을, 다룰 수 있는 '정신적 사건'임을 자각한다. 명상가는 예술가다. 고통을 삶의 일부로 포용하며 의미를 발견한다. 최악의 고통을신선한 창조의 씨앗으로 치환한다. 그렇게 성장과 이해와 자비의 꽃이 피어난다. 이제 고통은 더이상 회피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 여기의 나와 함께하는 삶의 일부로 껴안아진다. 심장을 빼앗겼다는 분노에 휩쌓여 자신을 잃어버렸던 테피티가, 이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보란듯이 창조의 기쁨을 피워내듯 말이다.

Moana/Vaiana (2016) - "Know Who You Are" / Heart of Te Fiti scene [1080]

두 번째 기쁨을 위하여
살다보면 '나 자신'과 '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지난 며칠간의 내가 그랬다.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나와 합이 맞지 않았고 그 순간들의 불편감이 오래 남았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회의감, 나 자신을 향한 자책과 무능감이 꿈틀거렸다. 이 책의 서평을 쓰고자 예정했던 날은 며칠 전이었고, 글을 쓰기 위해서 페이지를 열었으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책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며 글감을 쥐어짜봤지만 저항감만 일어났다. 그래서 글을 쓰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오늘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어 세번째 독서를 시작했다. 공에서 무상으로, 다시 무원으로 읽어내렸다. 며칠 전과 달랐다. 시야가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내 '내려놓음'에 이르러 내 마음의 육중한 무언가가 흘러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 조건에 따라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다. 나도 완벽하지 않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심지어 완벽의 기준 마저도" 그들에 대한 미움과 나를 향한 자책에 직면과 수용과 포용으로 이어졌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기억은 실체가 아니다. 어느새 흘러갈 정신적 사건일 뿐이다." 좁은 시야에 매몰되어 있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기억에 갇혀있는 나를 알아차려 본다. 지금의 행위는 나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중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어? 내가 그걸 해줄게." 시야와 마음과 감각이 열리며 또 하나의 작은 구멍이 트였다. 영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꺼이 맞이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가 이제 끝맺음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돌아본다. 나에게 묻는다. "무엇을 하고 싶어?" 나에게 두 번째 기쁨을 선물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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