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헤맬 때 몸이 하는 말들 - 자존감이란 몸으로부터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디아 지음 / 웨일북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자존감. 자아존중감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이 단어가 요즘의 화두다. 힘든 시대를 견디고 있는 현대인들의, 어떤 위기와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꿋꿋하게 버텨내고 끝내 행복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하는 염원이 담겨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책 '마음이 헤맬 때 몸이 하는 말들'을 읽고 그보다 더 중요한 감각을 놓치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되었다. 바로 '자기 존재감'이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느끼는 상태다. 이게 무슨 소린가? 내가 세상에 없다면 이 글을 쓰고 읽고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나는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는 거지. 암 그렇지. 정말 그런가?

몸을 상실한 사람들
네모난 TV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시대를 지나, 네모난 모니터가 그 자리를 차지하더니, 이제는 손바닥만한 네모를 거쳐 사람과 세상이 만난다. 단어는 있지만 표정은 없고 언어는 있지만 느낌은 없다. 설명은 난무하고 공감은 전무하다.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의 대화는 그렇다. 고립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연민과 관심은 오지랖이 되었으며 해석과 판단과 생각의 대향연에, 경험과 감각과 느낌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모든 과정속에서 근본적으로 소외된 것은 단연 우리의 '몸'이다. 몸으로 경험하는 와중에도, 감각하며 느끼지 않고, 생각하며 판단한다. 그 모든 과정속에서 우리의 몸은 '존재'가 아닌 '수단'이 된다.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의 원천인 몸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자극으로의 도피
최근, 건널목의 바닥면에 신호등의 색상을 표시하는 'LED 바닥신호등'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기는 바람에 신호등을 못보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사고가 증가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대응책의 일환이라고 했다. 아이디어가 신기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해야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나도 사실은 남말을 할 처지가 못된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을 앞두고도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주의가 팔려 시간을 낭비하고는 한다. 중요하거나 시급하지 않은 인터넷 서핑같은 사소한 자극에 주의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이와 관련된 오래된 경향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몸의 불쾌한 느낌'이 '자극으로의 도피'로 이어지는 패턴이다. 당장의 불편한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자극으로 도망치게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면한 일을 잘 하고 싶다는 부담감도 포함된다.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시간낭비로 이어지며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트리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게되는 것이다. 

중독, 몸으로부터의 도피
42 몸 심리학자 크리스 콜드웰은 중독을 이렇게 정의한다. '중독성 물질을 복용하는 식의 행동 양태라기 보다 우리 몸이 참다운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그 직접 경험에서 벗어나는 움직임.'
 중독은 당장의 힘든 느낌을 마주하지 않게 한다. 몸에서 떠나와 잠깐의 휴식을 준다. 몸을 떠나면 어떤 감각이나 감정, 그리고 좋지 않은 정신 상태를 막을 수 있다. 불편한 느낌에 스위치를 끄는 것이다. 콜드웰은 이런 중독을 '일종의 유체이탈 경험이며 자아와 세계의 연결 플러그를 뽑아놓는 행위'라고 했다.

166 불편해진 몸의 감각이 싫다. 이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몸에서 마음이 떠나기로 작정한다.먹고 마시는 순간 편안해진다. 쇼핑몰을 보고 있는 순간, 드라마에 빠져 있는 순간, 술에 취한 순간, 게임을 하고 있는 시간동안 맘껏 잊을 수 있다. 몸의 느낌을 떠나서 꽂히는 감각에 나를 맡긴다. 이런 도피성 감각추구가 지나치면 병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는 수많은 문제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168 우리가 폰을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폰이 우리를 작동시킨다. 빈 시간을 견디기 힘들다. 새로운 메시지, 새로운 뉴스는 몸-마음 연결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저자는 중독을 몸으로부터의 도피와 연결한다. 중독행위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몸으로 경험되는 불편한 감각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자아와 세계의 연결 플러그'를 뽑아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적극 공감하며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의 부정적 습관에 선행되는 몸의 감각을 세밀하게 경험하려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나를 인터넷 세계로 이끄는 몸의 불편한 느낌을 자각하게 되었다. 불안함, 두려움, 후회, 자책, 불만족과 같은 감정들과 연결된 몸의 느낌. 그것은 일종의 '신호'였다. 도망칠 필요도 없고, 외면해서도 안될, 몸의 목소리였다. 배가 고플 때는 먹었고, 과부하가 왔을때는 휴식을 취했다. 경험속에서 의미를 찾았고 막연한 불안을 구체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갈피를 잡을 수 없을때는, 바로 여기에서 쉬었다. 숨이다. 숨에서 쉬었다.

숨에서 쉬기
185 숨이 들어오는 한 우리는 '살려지고' 있다. 수동형으로 쓴 것에 주목했으면 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숨이 우리를 살게 한다. 밥도 물도 없이 숨만 잘 쉬면 당분간은 살 수 있다. 숨이 살려준다. 참 고마운, 그러나 의문이 드는 시스템이다. 살아가는 실제 원동력은 그냥 제공된다. 왜?

189 실제로 숨만 잘 쉬면 기분 나쁜 상태에 덜 젖어 있고, 화나거나 짜증나는 감정에도 덜 휘둘린다. 이런 실용성 말고도 숨의 진짜 효용은 이것이다. 바로 '시선의 발견'이다.

몸과 의식을 연결시켜주는 한 줄기 바람. 그것이 나를 살리고 있다. 흔히들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것으로 '산소'를 꼽는데 실질적으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숨이다. 내가 굳이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묵묵히 숨은 나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나는 이 신비한 과정을 위해 무엇을 지불했던가? 그저 태어났을 뿐이다.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숨은 나를 살려왔고 살리고 있으며 살려나갈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숨과 연결된 순간, 놓치고 살던 '감사함'이 존재를 드러냈다. 나는 숨을 건너 몸에게 안부를 물었고 몸은 숨을 통해 인사를 전했다. 숨을 지켜보며 몸과 만나는 시간동안은 판단도, 분별도, 비교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온전하게 수용하며 평화속에 쉬었다. 숨을 쉬며, 숨에서 쉬었다.

재즈, 요가, 그리고 산토샤
155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마일스는 그 화음을 실수로 인지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그 화음은 단지 그 순간에 나타난 현실일 뿐이었어요. ... 우리에게 중요한 건 성장하는 일이죠.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을 활짝 열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체험하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 어울리는 건설적인 일을 해내는 것이니까요.

155 요가의 권고사항 중에 산토샤라는 개념이 있다. 산토샤는 이 순간 행복을 선택하고 지난 순간을 후회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번 독서는 삶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 또한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책에 담긴 천재 피아니스트 마일스 데이비스의 일화와 '산토샤'를 통해서다. 마일스가 무대에서 <so what>을 연주하던 어느 날, 동료의 실수로 완전히 틀린 화음이 연주되었다. 이 때 마일스는 당황하지 않고 틀린 화음에 어울리는 멜로디로 바꿔 연주함으로써 순간을 완성했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재즈 속에서 요가를 발견할 수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나는 종종 타임머신을 탄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며 자책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망치며 불안해한다. 완벽한 악보를 떠올리고 완벽한 음정과 박자로 삶의 마디를 채우고자 하는 욕심에 빠져든다. 그 속에서 고통받는 것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다. 완벽한 삶의 악보는 없으며, 나 혼자서 연주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어떠한 화음이 주어지든 나만의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생기있고 자유로운 삶의 태도가 아닐까? 지금부터 채워나갈 내 삶의 궤적에 늘 재즈와 요가, 산토샤가 함께하기를 기대해본다.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50 몸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식물이 햇볕 쪽으로 온몸을 향하듯이, 행복한 감정을 일으키는 쪽으로 몸을 돌려가며 산다.

몸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에서 출발하여 몸과 함께하는 삶에 이르기까지, 책에는 요가인의 눈으로 바라본 몸과 삶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상의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직관적 지혜는 탐구할수록 깊어보였다. 생각하고 비교하고 분석하는 태도가 일상화되어있던 나에게, 몸과 함께하는 풍요롭고 부드러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나쁜 습관의 실행에 앞서 드러나는 몸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 함으로써, 자유로운 기쁨의 흐름을 열어낼 수 있었다.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이 헤메는 순간에도, 몸은 이미 충분한 지혜를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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