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침략이 가장 거셌던 곳은 아프리카였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2세는 1876년 국제 중앙 아프리카 탐험 및 문명 협의회를 조직하여 탐험가 스텐리를 파견하였다. 탐험가 스탠리는 아프리카에 가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말라리아와 같은 위험한 동물들이 많았다. 또 다른 문제는 아프리카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노예밀무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의 아시아 진출은 아프리카 때의 경험과는 달랐다. 동양 사람들은 서양사람들을 보면 귀신이나 도깨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처음 도착하였을때 아시아 인들은 그들을 적으로 대하거나 배척하였다. 아시아 인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보았고, 전통사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영국은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게 나오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프랑스는 거절하였다., 이렇게해서 세계1차세계대전이 작게 시작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르타고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로마의 3배나 되는 규모를 자랑했다. 가장 강력한 함대를 소유하고 있던 카프타고는 지중해를 우리바다 라고 선언하였고, 이런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원로원들은 카르타고가 너무 강해서 이길수없다고 했지만 로마 시민들은 오히려 분노하며 이길수있다고 했다. 이로써 기원전264년부터 146년까지 계속된 포에니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이때 로마의 장군들은 한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로마가 오랜시간동안 전쟁으로 인해 강해진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이 모두 육지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카르타고와 싸울려면 바다에서 싸워야하는데 카르타고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함대를 가지고있으니 매우 힘든전쟁이 될거라고했다. 하지만 로마는 농미을 해군으로 훈련시키고 단기간에 105척이라는 대함선을 건조시켜서 카르타고의 함대들을 처부셨다. 로마가 카르타고의 함대를 이길수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바로 공격용 사다리였다. 육지전에 강한 로마군인은 사다리를 통해 적의 배로 건너가 싸움을 한것이다. 그러나카르타고의 함선을 부셨을때는 이미 늦었다. 장군이 카르타고의 본토로 전진을 하려고 하자 폭풍우가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돌렸으나 휘몰아친 폭풍우는 로마의 함대를 모조리 바닷속으로 침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전쟁은 밀고 밀리는 끝없는 소모전으로 빠져들면서 오랬동안 이어졌다. 500척의 배가 파괴되고 20만명이나 죽은 비참한 전쟁이었다. 

나는 포에니전쟁을 한니발전쟁이라고 알고있었는데 한니발 전쟁은 2차 포에니 전쟁이고 1차포에니 전쟁도 있었다는것을 이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원전 493년에 로마를 주축으로 한 친선 동맹이 맺어지게 되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당시 그리스를 통일한 마케도니아가 세게 정복을 위해 동방을 진출하는 동안, 실용적인 성향의 로마 인들은 길부터 닦기 시작했다. 로마에서는 길을 제일 먼저만들었는데 시민 모두가 불평을 하지않고 군사의 도움이 되는 일이라며 오히려 뿌듯해 했다. 이렇게 건설된 도로중 로마와 카푸아 사이의 비아 아피아는 지금도 남아 있는 포장 도로로, 로마가 한때는 세계의 강자로 군림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로마는 점차 세력이 커지자 탄탄하게 다져놓은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차츰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로마의 첫 정복 대상은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그리스 인이 사는 도시였다. 이것을 눈치챈 그리스인이 그리스 본토의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피루스왕은 군사를 진격시켜 로마와의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피루스의 피해도 로마의 피해만큼 컸다. 피루스왕은 두차례에 걸쳐 그리스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땅에 진격하였으나 로마의 힘에 부딪혀 정복의 꿈은 이루지도 못했다. 당시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스를 막아낸 로마는 별 어려움 없이 도시국가를 굴복시켜, 지중해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로마의 경쟁자는 해양도시 카프타고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속으로 그리스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뜻대로 되기는 했지만 그리스군의 피해도 만만치안아 기쁘진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엽,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해온 라틴인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로마는 신과 레아 실비아의 아들인 로물루스가 세웠다. 사람들은 로물르스가 신의 아들이어서 말을 잘따랐다. 로물르스가 해가 질때까지 쟁이고 골을 낸 선이 새도시의 경계가 되었고, 일곱번째 언덕은 카피톨리노 광장이 되었다. 이곳엔 나중에 도시의 수호신 미네르바 신전이 세워지게 되었다. 

기원전509년경 로마에 자리잡은 라틴인은 에트루리아 인을 몰아내고 차츰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에트루리아 인 왕의 지배를 받아왔던 이들은 국왕 대신 선거에 의하여 통치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을 받아들였다. 로마건국자 로물루스가 설치하여 로마 건국 때부터 존재했던 원로원은 로마의 법과 중요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는 기관이었다. 귀족 가운데 매년 임기1년의 집정관 2명을 선출하였는데, 이들은 군사, 행정의 가장 큰 권력을 가졌다. 후에 로마가 커지자 재정관4명을 두어 집정관을 돕게 했고, 감찰관이 시민의 이름을 기록하거나 재산을 조사하고 법을 집행하였다. 

 원로원의 의원들은 모두 귀족중에서 선출되어 법이며 제도가 귀족에게만 유리해졌다. 그러자, 평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불만이 높은 이유중 하나가 평민들도 귀족과 같게 세금을 내는데 평민들은 선거에 참여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원전494년 로마의 평민이 귀족에 대항해 싸운 성산 사건으로 로마의 귀족들은 크게 당황했다. 

나는 로마가 세계의 강대국이지만 건국 초기에 이런 일과 원로원이 있었다는 것을 몰라싸. 하지만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같은 민족에게 총을 들이대고 싸운 남북한은 6.25전쟁으로 서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이 산가족이 생기고 정쟁고아가 생겼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가장큰 슬픔인 전사통지서는 남북한을 합처300만명이 넘었다. 6.25전쟁으로 나라전체가 초상집이었다.남북한이 가장 잘못한것은 각각 자기가 차지한 지역의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다. 인민군이 내려왔을때 남한의 공무원이나 부자들은 죽이고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왔을땐 거꾸로 공산주의자들을 골라죽였다. 그리고 인민군에 잡혀서 인민군이 하라는 대로했던포로들도 모두 죽였다. 

전쟁고아들이 배가고파 쓰레기통을  뒤지고 먹을것을찾으면 강자에게 빼앗기기도했다. 하지만 이런때에 전쟁고아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도 대부분 북한이나 남한에 이산가족을 둔 사람들이었다.그리고 근로자들의 직장도 파괴되어 잠잘곳도 사라졌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왔지만 잿더미만 남은 페허를 보고 망연자실했으며 유엔의 원조로 끼니를 때웠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때 일본과 미국은 무기를 납품하여 큰수익을 남겼다. 특히 일본은 13억달러가 넘는 수입으로 경제대국으로 되살아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