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얻은 깨달음의 순간!
한국인에게도 사랑받는 명배우 故키키 키린의 마지막 영화 《일일시호일》의 원작 에세이 『매일매일 좋은 날』. 일본의 인기 에세이스트 모리시타 노리코의 대표작인 이 책은 일본에서 긴 시간 동안 사랑받아 온 스테디셀러이다. 스무 살의 노리코는 엄마의 권유로 다도를 접하게 된다. 고리타분한 전통이라 생각하면서도 노리코는 남다른 몸가짐에 똑 부러진 성격을 가진 다케다에게 다도를 배워보기로 한다.
그저 차를 타서 마시면 될 것을, 다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동작과 엄격한 규칙들로 가득하다. 방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왼발부터, 다다미 한 장은 여섯 걸음으로. 거기다 왜 그렇게 해야 하냐는 물음에는 의미는 몰라도 되니 어쨌든 그렇게 해야 한다고만 한다. 다실에 걸려 있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글귀는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다.
복잡한 다도의 세계에서 노리코가 처음으로 순수한 기쁨을 느낀 순간은 까다로운 규칙에 맞춰 몸이 절로 움직였을 때다.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다케다의 말처럼 어려운 동작들에도 익숙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스무 살에서 삼십 대, 그리고 사십 대로 이어지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던 그것은, 알아가는 데 시간이 필요한 다도처럼 책의 전반에 걸쳐 조금씩 밝혀진다. 책의 끝에서 마주치게 될 커다란 메시지가 지친 일상을 위로하는 차 한 잔처럼 인생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토닥인다.
“삭삭삭” ― 마음의 균형을 찾아주는 따뜻한 울림.
2019년 1월 개봉 영화 <일일시호일> 원작이자 40만 부 돌파 아마존 베스트셀러, 모리시타 노리코의 <매일 매일 좋은 날>.
“실수해도 괜찮아.
그저 움직임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는 거야.”
다도의 복잡한 규칙 너머에서 찾은 삶의 단순한 진리.
오늘 친구와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스칼렛이라는 차였는데 과일 향이 상큼해 향만 맡아도 기분이 좋았다.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오늘처럼 찬바람 부는 한겨울엔 따뜻한 차가 더욱 맛있는 것 같다. 주로 티백을 따뜻한 물에 우려 마시지만 요즘은 차 한 잔 즐길 여유가 없어 사무실에서 텀블러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티백 한나 우려서 물처럼 마시고 있다.
차 마시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차 마시는 행위보단 차를 마시기까지의 시간과 차를 마시고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조용한 뉴에이지가 흐르는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서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읽으며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가며 겨울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럴 때에 <매일 매일 좋은 날>을 만났다.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다도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집에 다도와 관련한 도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간편한 티백이 있는데 뭐하러 귀찮게 ……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뭐하러?
작년 가을즈음에 성수동에 있는 한 카페를 방문한 적이 있다. 말차를 전문적으로 파는 찻집이었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런 분위기를 상상하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곳은 본격적으로 그리고 정석대로 말차를 파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도 진한 말차 한 잔을 마셨다. 넓직한 창 밖으론 푸른 서울숲이 보였다. 드넓은 잔디밭에 앉아 깊게 우린 말차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다도라고 하니 그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 생각났다. 내 삶에 다도라는 건 경험해보지 못했던 앞으로도 경험할 일이 딱히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다도를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코 끝을 찌르던 향 냄새가 은은히 느껴졌고 말차를 빻는 소리가 들렸고 굉장히 고요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명상에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매일 매일 깊고 얕은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나는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남들은 저리 바쁘게 움직이는데 잠깐 멈춰있어도 괜찮다는 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지 않을까. 시간은 지나치게 빨리 흐르고 난 조금 느리고 게으르게 살고 싶다.
계속 여기에 있었고 어딘가에 갈 필요도 없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야만 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부족한 것도 무엇 하나 없다.
나는 그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온전히 충족시키고 있었다.
다도란 ‘찻잎 따기에서 달여 마시기까지 다사로써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덕을 쌓는 행위’라고 한다. 그래서 다도는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꾸준하게 배우며 성장해가야 하는 행위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건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것.
빨리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건 다도의 마음가짐이었던 것일까. <매일 매일 좋은 날>이 그래서 일일시호일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정여울 작가는 <매일 매일 좋은 날>에 대해 ‘아무리 지치고 힘든 날이라도, 차와 함께하는 고요한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괜찮아질 것만 같다.’라고 말했다. 남들보다 남들만큼 빨리 달릴 필요는 없다. 내가 잘 해낼 수 있도록 그것이 오래 걸릴지라도 천천히 꾸준히 해 나가겠다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차와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면 나의 오늘도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될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