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을 따라가면 달까지 갈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 숲에서 나타났다가 구혼자들이 싫어 달로 돌아가고 이 세계를 모두 잊었다는 가구야 공주, 남편인 예를 두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지만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달에서 산다는 선녀 항아, 그리고 바위를 타고 흘러가버린 남편을 따라 저 먼 섬나라로 간 후 그를 만나 돌아오지 않는 세오녀. 모두 이곳에서 떠난 여자들이었다. - P368
점의 내러티브는 대체로 모호하다. 어느 상황에서도 들어맞는 거대 서사 같다. 어떤 일이든 하고자 하면 희생이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살면서 남에게 상처를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죄책감 없이 말끔한 사람이 많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모호한 일반론을 예언으로바꾸는 건 말하는 사람의 확신이다. 지금 윤정의 목소리에는 그 확신이 담겨 있었다. - P373
나쁜 점괘를 받고 화를 낼 거라면 점을 보지 않는 편이좋다. 이런 사람은 자기암시가 강해 나쁜 점괘에 지배당하게 된다. 하지만 점의 역설적인 면은 보통 이렇게 암시에 약한 사람들이 남에게 자기 확신을 대신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점쟁이를 찾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 P377
죄책감을 품고 사는 사람은 많다. 누구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죄책감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죄책감은 열쇠이기도 했다. 그걸 잘돌리면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의 방 안으로 다가갈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열쇠를 돌릴 참이었다. - P381
"감희연 배우………… 안티채팅방이었군요. 그래서 고소까지 당한." 소진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단순히 모여서 감희연에대해 악플을 쏟아내기만 하는 채팅방인 것만은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루머를 만들고, 게시판에 올리고, 관련 게시글의 댓글마다 악플을 써서 여론을 나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감희연이 나온 영화의 장면을 캡처해서 우스운 밈으로 만들거나, 예능에 출연했을 때 태도 논란을 만들거나, 그런 내용을 기자에게 제보하기도 했다. 과거를 캐서 학교폭력 논란이나 다른 물의를 일으킬 만한 일이 없는지 조사하기도 했다. - P384
그들은 미움의 공동체였다. 일면식도 없는 한 사람을 끌어내리기 위한 모임. 악의로 부글부글 가득 찼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감희연이 <무고의 저택〉으로 상을 받고, 승온준과 열애설이 나고, 악플이나 태도 논란에도 생글생글 웃는 게 싫었다고 했다. - P385
살면서 자기가 정말로 잘못했다고 반성하는 사람은 드물다. 반성과 후회, 진정한 사과와 속죄는 처벌과 후환을 두려워할 때만 생기는 감정이다.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할 대상이 사라질 때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안심한다. 공시생도 소진도, 채팅방의 멤버들도 안심했을 것이다. 자기가 괴롭혔던 사람이 죽었으니 벌을 주러올 사람도 없다. 하지만 대상이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징벌이 닥쳐온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 P387
저주는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저주의 말이라도 가슴의 못 대신 박아주고 싶었다. 저주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주받은 자에게 불운이 일어날 거라는 확신, 그 확신이 바로 불운을 만든다. - P423
"상상해봤어요? 내가 나로서 살아간다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내가 하는 일이 모두 부정당하고, 내가 실수하기를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순정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파도와 함께 흘러갔다. 바닷물에 흘려보내야 할 이야기였다. "매일이 힘겨웠어요. 약을 먹고 잠들어서 다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고, 병원에 다녔지만 호전되지 않았죠." - P429
남에게는 예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게는 약속으로들리는 말이었다. 약속은 늘 실현되는 건 아니지만, 실현되는 모든 약속에는 예언적 성격이 있었다. 마술적 사고를 하는 내게는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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