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연한 의지와 합리적인 결론이라기보단 스스로도 멈출 수없는 사춘기의 들끓는 호기였을 테지만 엄마와 아빠는 가경을 말리지 않았다. 대신 가경의 곁을 지키겠다고 했다. 교장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가경은 언젠가 구름 언니와 비밀 던전의 최종 보스 몬스터를 잡으러 가던 때를 떠올렸다. 궁수와 주술사 둘이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강한 몬스터였다. 그래도 둘은 갔다. 알면서도 갔다. - 우리 너무 비장하지 말고 신나게 가자. - 그래, 계속 쏘다 보면 언젠가 죽겠지. 호기롭게 말했지만 몇 번이나 죽는 건 몬스터가 아니라 가경과 구름 언니였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후회하지 않았다. 언니와 게임 하는 거 너무 좋았다. 정말로. - P60
도무지 완벽히 공략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상이라는 던전을 헤매는 동안 지치지 않게 돕는 것. 친구들을, 삶을 살아내는 동료들을,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는 회복 물약이 될 수만 있다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쯤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토록 쉽고 확실한 찰나가 자꾸만 삶에 달라붙는 피로를 녹이고 몸을 가뿐하게 만들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애쓰고 간절해지리라 결심했다. - P64
"공무원들은 왜 이렇게 떡을 좋아할까." 가경이 앉은 가족관계팀 민원대 옆자리의 여권민원팀 박주사가 쑥떡 포장을 뜯으며 혼잣말을 했다. 인사 발령 철이 되면 매일,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떡상자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사 뒤에 이웃에게 떡을 돌리거나 개업하고 주변 가게에 떡을 돌리는 것처럼, 신규 발령을 받거나 인사이동을 한 공무원 이름으로 떡이 도는 것이 공무원 사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여기저기서 떡을 보내서 그의 면을 세워주려 했다. 하주시에서는 신규 발령이라면 축하의 의미로 첫 동료가 되는 팀원들이, 인사이동이라면 새로운 팀에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를 담아 이전 부서에서 함께일했던 동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떡을 맞춰주었다. - P67
"50년 가까이 함께 산 두 여자가 부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법이 바뀌거나 외국에 나가지 않고, 언젠가는 바라는 대로 될 거라고 기대하면서 기다리지 않고, 나중에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도선미는 대답 없이 가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로 저예요. 그리고…………." - P88
가경이 흔들리는 도선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눈을 맞췄다. "도선미 주사님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무원이요." 아. 도선미가 가경이 하려는 말을 이제야 알겠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 두 여자가 부부라는 걸 알고 있는, 두 사람을 부부로 만들어주고 싶은 공무원 두 사람. 그거면 돼요."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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