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문득 우리가 모든 역사를 알아야 하는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삶에는 자연도태의 법칙이 있잖아. 알리기 싫은 것들이 있으면 삶은 모종의 방식으로 그걸 감춰버리지. 그럴 때는 아예 몰라도 되는 거야. 어차피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더 많고 아는 일은 적으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힘들게 알아낸 것들이 당시의 진실이라고 보이지도 않아."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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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쯔타오를 데리고 성당에 간다. 루르드 성모상 앞에 이르렀을때 쯔타오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당시 사람들도 "누구세요?"라고 물었으며 그녀는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노라고 알려줬다. 쯔타오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성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바닥에 글자도 써줬다. 쯔타오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는 원죄가 없다는 뜻이라고 답한 뒤 이 세상에서는 나와 그녀 모두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리송한 눈치였지만 내 말을 가슴에 새겼다. 다음날에는 루르드 성모를 보고 속으로 ‘나는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중얼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게 옳다. 내게는 그녀의 평온이 필요하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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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흙을 메웠는지 몰랐다. 평소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재잘재잘, 바스락바스락 울리던 집안의 소리가 전부 사라졌다. 한때 미소 짓던, 슬퍼하던, 키득거리던, 찡그리던, 침울해하던 얼굴이 전부 똑같이 변해버렸다.
이런 밤을 겪었는데 제가 살아 있는 것 같나요? 그녀는 속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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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오랜 시간을 한결같이 보냈다. 한 해 한 해의 시간이 세밀하고 촘촘한 막처럼 그녀의 기억 뒤편에 놓인 것들을 층층이 덮었다. 한해에 한 장씩, 시간이 흐르면서 얇았던 막이 두껍게 쌓였고 판처럼 굳어졌다. 그렇게 그녀의 의식 속에 깊이 숨겨진 마귀들이 모조리 봉인되었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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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 시설로 위장한 안가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었다. 실은 사무용 건물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성을 마음껏 음미했다. 건물 1층에는 루비 튜즈데이가 있었다. 화장실에선 법률사무보조원들이 립스틱을 수정하며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사라진 핵배낭을 추적하고 천연두와 탄저균의 변종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사람들이 자기들 사이에 섞여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매번 위협 보고서에 사상자 추정치를 적어 넣을 때 그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게 우리의 임무였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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