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 P57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창 아래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앉아 그녀는 손톱들의 거스러미를 뜯어낸다. 실내가 따뜻하지만 목도리를 내릴 수는 없다. 문신 같은 뺨의 상처가 라디에이터의 열기에 달아오른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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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P17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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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쑥스러워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정신연령을 15세 정도 낮춰 즐기지 않으면 손해인 거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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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첫 결혼기념일. 나는 발찌로 멋을 내고 리이치로와 식사를 했다. 던킨도넛에서 만나 책과 책값을 교환했다. ‘하나카고‘에서는 부부싸움의 연장선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고, 좋은 남자 소개시켜 줄게, 좋은 여자 소개시켜줄게, 그런 말을 하지 말걸. 엄마가 되어주면 되는 거라고 아버지가 계시해 주었다. 다시 시작해 보자고 리이치로에게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늦었다.
리이치로가 그녀와 행복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난 후, 내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하자. 리이치로가 그녀와 행복해지는 일에 주저하고 있다면, 행복한 내 모습을 보여주자. 그러면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거야. 언제든 상대를 위해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를 두고, 지금이 우리 두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겠냐고, 시즈카가 말했다. - P246

리이치로는 결혼해서 내 곁에서 떠나가 버린다. 나는 어쩌다 이런 곳에서 이런 말을 외치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 급기야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적셨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오열. 식장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문 가까이에 있던 시즈카는 이 사태를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신랑 측 맨 앞자리에 앉은 모리이치 씨와 교코 씨가 애처로운 나머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신부 측 하객 대부분은 내가 리이치로의 전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때문에, 그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다미코 씨의 아버지는 기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떡할 거야, 이 분위기."
리이치로는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니라 모두에게 들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화를 냈다.
"미안......."
나는 흠칫거리며 사과했다.
"미안이 아니잖아. 여기 있는 사람 다 울릴 작정이야?" - P247

"어떡하지."
"어쩐지 내가 널 괴롭히는 것 같잖아."
"그렇네."
"어떤 목사가 이런 데서 우냐?"
다미코 씨가 리이치로의 팔을 붙들었다. 화내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리이치로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게 다가오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좋아서 벌인 일이잖아. 당신이 결혼할 때는 내가 주례서줄게, 라고. 나를 끝까지 확실하게 지켜봐 주는 거 아니었어?
뭐야, 그 꼴이 목사님한테 사흘씩이나 훈련받은 결과가 겨우 이거야? 정신차려, 하루. 네 충고를 듣고 싶어. 로마인에게 보내는편지잖아. 네가 나한테 보내는 편지잖아. 마지막 문구가 뭐냐고!"
리이치로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울지마, 바보야. 제대로 좀 해봐!"
리이치로의 스크린에는 어떤 영상이 떠올랐을까. 나의 웃는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리라. 내 미소가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것, 때로는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던 기억을 떠올려 주기 바랐으리라.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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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어째서 스스로 상처 입을 만큼 실패하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해 너그러워지지 못하는 걸까? 인간은 정작 너그러워져야 될 시기를 항상 놓치고 만다니까." - P134

"헤어지고 나서 비로소 서로를 너그럽게 배려하는 게 두 사람의 운명이었나 보지."
백마 탄 왕자님을 마음속에 그리던 그 시절, 붉은 실의 전설에대해서도 꿈을 꿨던가.
붉은 실이 진작부터 한 쌍의 남녀를 이어주고 있다잖아. 나는 어떤 남자와 붉은 실로 이어져 있으며, 언제쯤 그 상대를 끌어당길 수 있을까? 리이치로와 결혼했을 때는 이 사람의 새끼손가락에 나의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믿었다. 이혼신고서를 주고받았을 때도, 헤어진 후 그의 주변에 여자들이 맴돌았을 때도, 최근의 예를 들면 가스미가 나타났을 때도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실은끊어진 게 아니라 여전히 손가락과 손가락을 잇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그것은 사실 함께 살기 위한 실이 아니라, 멀리서 서로를 지켜보기 위한 실이었을 텐데. 결국 붉은 색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너그러움의 실은 어떤 색일까? 나와 리이치로는 그런 실로 평생 이어지는 걸까?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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