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발레는 규칙과 규율이 명확한 날 선 칼 같은 춤이다. 손끝의 위치, 발끝의 지점을 무섭도록 정확히요구한다. 나의 경우, 한 번 본 안무를 복사한 듯이 외우는 요상한 능력덕분에 그 비정한 규칙에서 그나마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솔로와 군무에서의 얘기였다. 파드되는 사정이 달랐다. 상대를 고스란히느끼고 부딪치고 이해하면서 맞춰야 해서 나의 그 능력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강유리의 말대로, 나는 누군가와 얽히는 것이 불편하다. 나를그만큼 드러내야 하는 것도 싫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람을 피하고싶다. 그런데 강유리는 내가 날 드러내지 않아도, 내가 본인을 보려 하지않아도 나에게 맞춘다.
‘파드되도 자유로워‘
파드되 안에서도 솔로와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내 팔이 있는 곳에그 애의 팔이 와 있었다. 내가 뛰는 곳에 그 애의 팔이 정확하게 존재했다. 내가 무엇을 요구해도 맞춰 준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춤을 춰도 강유리의 알브레히트는 나를 지젤로 만들어 줄 것 같았다. - P117
한국은 대학 무용과를 진학해서 졸업할 즈음에 무용단에 입단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외국은 조금 달랐다. 대학까지 가서 무용을 배우는 시스템보다는 20살 즈음에 입단해서 코르 드 발레부터 차근차근 직업 무용수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만약 강유리가 계속 모스크바 국립무용아카데미에 있었다면 1, 2년 내에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했을 것이다.) 나는 어차피 무용과에 진학하지도 못할 거고, 당연히 무용단에 입단할 수도 없을 텐데 이것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 P143
"오슬비, 온두리, 최재호. 다음 주 금요일 2차 예선 빈틈없이 준비해지젤 배리에이션은 전공 반 수업 때 연습하면 되고, 다른 배리에이션들은 셋 모두 다르니까 그건 개인 레슨 때 하고."
2차 예선과 세미파이널까지는 솔로 배리에이션 두 개를 무대에서 보여줘야 했다. 세미파이널을 통과하고 파이널에 진출해서는 세미파이널에서보여 준 배리에이션 하나와 새로운 배리에이션, 그리고 컨템포러리(현대적인) 배리에이션을 보여 주면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총 네 개의 배리에이션을 죽어라 연습해야 했다.
"온두리는 예외적인 상황이니까 그렇다 치고, 그 외에 우리 학원에서예선 탈락자가 나오는 건 수치야. 특히 전공 A반에서는 말이 안 된다는거 알지?" - P144
올해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참가자들의 수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럼에도 오슬비는 세미파이널을 거뜬하게 통과하고 파이널 무대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최재호도 발레 주니어 남자 부문에서 1등을했다. 시상식은 파이널 무대 다음 날에 열렸는데, 오슬비와 최재호가 호명되어 올라갈 때의 박수소리는 유난히 컸다. 오슬비는 꼭 고고한 여왕같았다.
시상식이 끝난 뒤에는 리셉션이 있었다. 국제 발레단의 예술감독이나자문위원, 국제 무용학교의 교장 등 프로페셔널한 이력의 심사위원들과수상자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였다. 원장선생님과 나, 강유리도 함께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내가 들어가자 케이터링된 음식을 오물오물 씹으며 오가던 대화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끊기는 게 보였다. 수상자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 P175
"흠, 파드되를 제대로 하게 되면 아주 좋을 거라고 했나? 그래, 그랬던 것 같다. 파드되는 말이야. 관객에게도 무대의 꽃이지만, 무용수에게도 클라이맥스거든. 상대의 호흡, 느낌, 동작, 마음, 중심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맞춰 가야만 그 정수를 느낄 수 있지.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톱니가 정확히 맞아 돌아가는 그 기쁨! 환희! 상대가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나도 그를 이해하고, 나만 빛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빛나려고 하는 그 파트너링! 거기서 오는 애정! 이게 춤을 더 아름답게만드는 거거든."
중간부터 목소리가 점점 더 확신에 찼다. 마지막에 원장 선생님은 과장되게 팔을 쫙 펼쳐 보이면서 ‘짜잔‘ 하는 제스처까지 했다.
"아...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당연히 같이 미친 듯이 연습하면서 합을 맞춰야지."
원장 선생님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파트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야."
소중하게. 단어가 입안에서 조용히 굴러갔다. 소중하게. 소리 없이 몇번을 웅얼거렸다. 원장 선생님은 천천히 내게로 몸을 기울이더니 손을살짝 건드렸다. 원장 선생님은 아주 느릿하고 부드럽게 내 손등을 원장선생님의 손으로 덮었다.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거지." - P207
‘이상한 일이야‘
내가 무대를 하고 있다니. 아니, 그보다 이상한 것은 이 순간의 모든 것이었다. 우주에 부유한 듯한 이 느낌. 몸과 마음에 일체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는 멍했고, 시간의 흐름조차 멈춘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나와 강유리, 춤과 음악만 남은 것 같았다. 기묘한 감각은 지젤 2막 아다지오가 끝나가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신이 잠시 열어 둔 전지전능의 세계가 다시 슬그머니 닫히는 느낌이었다.
이 파드되는 사랑과 헌신으로 알브레히트의 목숨을 구하고 다시 무덤속으로 돌아가는 지젤과, 그런 지젤을 붙잡지 못하고 슬퍼하는 알브레히트의 모습으로 끝난다. 나의 마지막 안무를 마치는 순간, 다리가 무대에박힌 나무뿌리가 된 듯했다.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리와 손끝, 팔, 어깨, 목・・・ 차례로 무게감이 돌아왔다. 현실의 감각들이 온전해졌다.
"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어리둥절한 탄성은, 방금까지의 일이 정말로 꿈이나 환상같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나 이마에서 흘러, 코끝과 턱 끝을지나 무대로 톡 떨어지는 땀방울은 현실이었다. 나는 천천히 정면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저편은 고요했고,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아까까지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나.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인상을 찌푸렸다. - P219
실루엣이 흐릿하게 잡힌다 싶은 순간에 저편에서 ‘짝, 짝‘ 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서너 번 천천히 반복되던 소리는 점차 늘어났다.
"어...?"
다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사람들이 제대로 보였다.
20명 정도 될까.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강유리가 옆으로 다가와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나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자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관객의 얼굴이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심장은 마치 내가 여기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크게 뛰었다. 손이 저절로 가슴으로 올라갔다. 슬쩍 누르자, 쿵쾅거리는박동이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 머리까지 울리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 지젤을 추고 있을 때만큼 기이한 감각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나의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나 자신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심장소리는 내가 여기 있다고 애타게 소리치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어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뭔가가 머리를 번뜩 스쳤다.
-온두리, 너 왜 발레를 시작했니?
원장 선생님이 했던 질문이다. 나는 다시 가슴을 꾹 눌렀다. 놀랍도록확실한 생명력이 여전히 힘차게 느껴졌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실감나게 느껴진 적이 또 있었던가. 스스로의 거센 박동으로부터 전해져 오는게 있었다.
"괜찮아?" - P220
등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강유리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나치게 따뜻하고, 과하게 부드러워서 눈물이 났다. 원장 선생님은 좋은파트너가 되려면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내 손 위로 원장선생님의 손을 겹쳤었다. 그때도 따뜻했다.
그 순간에 내가 오래도록 발레를 붙잡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뉴턴이중력을 발견했을 때처럼, 헬렌 켈러가 물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깨달았을 때처럼 갑작스럽고 번뜩이는 직감이었다.
‘나였어‘
엄마를 붙잡은 게 아니었다. 나는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발레는... 혼란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증거였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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