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서울로 갔을 때 나는 봄이 되자 곤혹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나를 둘러싼 물의 세계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였다. 맡게 되는 물 냄새가 너무도 달랐다. 주방의 수돗물 냄새, 골목 하수도의 구정물 냄새, 지붕 홈통에 고인 빗물 냄새, 마당 수돗가에 푸릇한 이끼들과 함께 고여 있는 잔물 냄새,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는 한강의 냄새가. - P74

그 당시 전철 차창은 아래위로 나뉘어 위쪽을 열 수 있었는데, 3호선을 타고 철교를 건너며 맡는 강물 냄새에는 바다 내음에서 나던 알싸한 상승감 같은 것이 없었다. 그건 어쩐지 콧속을 너무 보드랍게 문질렀다. - P75

하기는 강화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코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건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 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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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는 감사했어요. 누군가 그렇게 절 위해 비명을 질러준 건 처음이에요." - P259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뿐이라고, 이마치는 생각했다.
누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다고, 이 잔을 비우고 나면,
그녀도 넘어갈 거라고. - P262

왜 자신을 그토록 도와주려 하는가 묻자, 노파는 뒤늦게 이마치의 팬임을 고백했다. 그녀의 작품들, 그녀가 연기한 사람들로부터 매 순간 위로받았다고. 이마치는 볼이 붉어지는것을 느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 말에는 면역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아름답다거나 명석하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연기가 좋았다는 말은 믿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 P264

가끔 내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얼마나 많은 오렌지를 먹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곳에 가봤을지. 나는 어린 나이에 죽어서 그 모든 기회를 잃어버렸다.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제 와서 그 일이 누구 책임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지금 나는 그 일을 멀리서 바라본다. 죽음이란 삼인칭이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이 삼인칭으로 산화함을 아는 것이다. - P272

남자는 그들에게 이야기해준다. 이마치의 길고 긴 필모그래피에 대해서. 그녀는 인물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을 연기하는 배우였다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속절없이 이끌렸다고, 그런 식의 연기를 하는 사람은 전으로도 후로도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오래된 필름에 관심이 없다. - P280

나는 이마치에게 폭풍우의 잔재가파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때 바다를 잘게 부수어 집어삼퀸 에너지가 물결이 되어 끝없이 흘러오는 거라고.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속삭인다. - P282

눈물, 이별의 말들, 지루한 기도문. 그리고 마침내 먼 곳으로부터 파동이 느껴진다. 대양을 항해하고 도달한 유려한 곡선의 물결. 우리는 그것을 잡아탈 준비를 한다. 이마치가 앞서가고 내가 뒤따라간다. 우리 자신이 파도 같다는 말에 이마치가 슬쩍 뒤돌아보며 웃는다. 그녀는 더이상 비밀이 없고, 한줌의 공기처럼 가벼워져서 날아오른다. 무한한 파도, 영원한 파도, 그녀 자신의 파도 속으로.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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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도 엄마들이 말하는 방법, 짧은 소리를 내고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함박웃음 짓는 방식은 알고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 그럴싸하게 흉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 P124

"죽음이 어떤 건지 알아?"
이마치는 영원히 젊은 그 청년을 놀리듯 물었다.
"알죠. 그건 고장난 엘리베이터 같은 거예요. 깊은 어둠 속을 한없이 하강하다가 마침내 쾅, 부서져버리는 거요." - P127

"여긴 그림자가 없네."
노아가 뒤돌아 벽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벽에 그림자가 돋아났다. 얼룩 한 점 없는 하얀 벽에 검은 실루엣이 그려지는것을 그들은 동시에 목격했다.
"이래도 내가 잘못 봤다고 할 거야?"
이마치는 조용히 물었다.
"이건 무슨 평행우주 같은 건가? 아니면 내가 정말 신이라도 돼서 말씀으로 이곳을 짓고 허물 수 있는 거야?"
노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 P140

"시스템이 재정비되는 거예요. 당신이 정보를 주면, 건물이
판단하고 받아들이죠. 일종의 업데이트예요."
"업데이트? 건물의 조건이 바뀐다는 건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건물은 끊임없이 학습해요. 살아 있는 생물처럼, 당신이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거나 알아차리면 그걸 반영해서 다시 구성되죠." - P141

새삼 저 상태로 드라마를 찍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녀가 맡은 역할은 한국 남자를 사랑하게된 늙은 게이샤였다. 그녀의 앙상한 몸과 텅 빈 눈동자가 비운의 인물과 소름 끼치게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인공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 강렬한 역할이었다. 그 역할로 인해 이마치는 자신의 커리어, 한계, 자질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마치는 영혼이 몸과 분리되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육신이 움직이는 모양을 멀찌감치서 초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채권자들을 달래기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했고, 집을 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었고, 딸은 친척집에 맡겨둔 채였다. 그녀는 자멸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신기했다. 이만큼의 절망으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 - P169

이마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체호프의 「갈매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는 니나의 독백.

전 무대 위에 서면 취해요. 거기서는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여기 고향에 온 날부터 걸었어요.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 마음과 영혼이 매일매일 강해져가고 있는 걸 느꼈어요. 이제 알 것 같아요. 코스챠, 작가든 배우든 간에 우리 일에는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들도 명예나 성공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 - P175

노아가 정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대한의 정민이 아닐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정민이긴 했다. 한 방울 혹은 두 방울의 정민이라고 해도 이마치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했다. 이마치는 그 사실을 노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너는 나에게 정말 귀한 존재라고, 세상 무엇과도 너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꼭 지금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완벽한 순간, 앎이 은총이 된 순간에 이마치는 그저 아이들 곁에 좀더 머물고 싶었다. - P187

당신의 모든 걸 사랑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당신의 표정이야. 세상에 실망할 대로 실망한 표정. 그런 한편으로 호기심을 버릴 수 없는 표정. 그러니까 이게 다는 아닐 거라는, 뭔가 더 남아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담긴 표정. 그 표정이 당신을 배우로 만들었지. 사람들이 배우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어하는 건 그 안에 어떤 약속이 있기 때문이야. 그건 아마도 미래와 희망에 대한 약속일 거야. - P190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결락을 경험하게 했다. 아니, 그건 망각과 상관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이마치는 다른 삶의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 생존 이상의 것, 그것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것을 꿈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 P198

이마치는 12월생이었다. 한 해를 넘겨 3월까지 살아남았고, 누락된 출생신고를 할 경우 쌀을 준다는 소문에 등 떠밀린 어머니에게서 마치란 이름을 받았다. 그러니까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그럴듯한 유년을 위해, 환상을 위해, 경멸과 수치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거짓말. 결국 자기마저 속인 거짓말.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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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아름다웠다. 이마치는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너는 아름답다는 말. 그녀는 한 번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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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스스로를 인정하는 유일한 순간은 배우로서의 순간이었다. 그 외의 삶은 모조리 실패했고,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 그 일이 그녀를 살게 했다. 일은 그녀의 전부였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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