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영혜가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장모의 음성에 걱정이 어렸다. 평소에 장모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둘째딸이지만, 자식은 자식인 모양이었다.
"고기를 안 먹는답니다."
"뭐라고?"
"고기를 전혀 안 먹고 풀만 먹고 삽니다. 여러 달 됐어요."
"그게 무슨 얘긴가? 다이어튼가 뭔갈 하는 건 아닐 테고."
"글쎄, 아무리 제가 말려도 듣질 않습니다. 덕분에 저도 집에서 고기맛을 본 지 오래됐습니다."
장모의 말문이 막혔다. 막힌 틈을 타 나는 쐐기를 박았다.
"집사람 몸이 얼마나 허약해졌는지 모릅니다."
"안되겠구만. 옆에 영혜 있으면 바꿔주게."
"지금은 자러 갔습니다. 내일 아침에 전화하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야, 두게. 내일 아침에 내가 전화함세. 그애가 왜 안하던 짓을...... 자네한테 면목이 없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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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생활을 ‘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종종 한다. 카리스마 없는 내가 말 안 듣는 나를 돌보는 이 비극의 고리는 언제 끊길 것인가. - P300

대체로 만족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중에 아쉬운 것 한 가지는 나에게도 어른이 있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가끔 꾀병에 눈감아주고, 어제 소영이가 아파서 숙제(원고)를 못 마쳤다고 학교(출판사)에 전화해줄 어른 말이다. - P301

혹시 나는 ‘나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 뒤로 숨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도 어른이면서 아닌 척하느라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읊어온 것 아닐까? 그분들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먼 훗날의 일로 미룬 것 같다.
어른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은 ‘훌륭한 어른‘한테 여러 책임을 떠넘겼다는 뜻도 된다. 내 생각이 지나친 걸까? - P303

알고보니 어른의 어른은 알람이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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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은 책임을 나누고 측정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라고 했다.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남들과 함께해야만 한다고도 했다. 생각해보면 책임을 다해야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당연하다. 나는 나대로 계속해서 배우고, 알려줄 수 있는 이들에게 알릴 책임이 있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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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류에 공헌하겠다거나 다른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뭔가 더 발전해봐야 지구만 망가진다. 모두 다 저 잘난 맛에 자기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살아왔고, 부수적으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거나 또 감당할 만큼만 살아왔다고 본다. - P242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쓸 무렵 자신의 주인공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세 가지 요소로 유머, 친절함, 자기 억제를 들었다. 이 세 가지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라는 거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모순, 자아, 공포 따위는 쓰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구태여 쓸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한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부정적인 요소는 잠시 접어두고, 유머와 친절함, 자기 억제라는 덕목으로 가볍게 날아올라보는 건 어떨까? 심각한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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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뜬금없이 물메기탕 맛있게 끓이는 요리 강좌가 펼쳐지고, 요즘은 김장용 배추가 해남산이 좋냐 강원도 고랭지 배추가 좋냐 비교검토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친정동네 고추를 자랑하다가 공동구매까지 한다. 지켜보면 공동구매 목록도 다양하다. 남해의 젓갈, 또 어디의 건미역, 김, 곶감, 고사리, 칡즙 이외에도 그때그때 종류도 다양하다. 주로 타지에서 인연 따라 부산으로 온 사람이 자신의친정 동네나 잘 아는 사람의 농장을 연결하는 구조다. 또누군가 몸의 어디가 아프다 하면 치료 방법과 효과 있는병원과 여러 대처할 의견이 줄줄이 이어지고, 근육통이 있거나 허리가 아프다면 사우나의 뜨거운 옥돌벽에 수건을 감고 기대는 게 병원의 물리치료보다 낫다며 권한다. - P141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앞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 주변에는 큰 돌을 편평하게 놓고 그 돌을 파내어 돌학이라는 걸 만들어두었는데, 우리는 이걸 호박샘이라 불렀다. 호박샘은 요새로 치자면 믹서기 역할을 했는데, 뭔가를 으깰 때나 아니면 작은 절구 용도로 사용했다. 그옆에는 맷돌이 있었는데, 이 세 가지는 우리집에 있는 것이지만 동네 사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당시는 우물물을 길어다 식수나 물이 필요한 모든 용처에 사용했기 때문에 동네에서 우리집은 우물집이라 불렸고, 동네 사람 누구라도 우물을 길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어른들은 ‘물왕대복‘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지금도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물 인심이 좋아야 큰 복을받는다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일에도 법도가 있으므로 해 지고 난 뒤에는 우물물을 길러 오지 않았고, 아침에 아버지가 나가시면서 대문을 활짝 열어두어야만 우물물을 길러 올 수 있었다. 그러니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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