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진 뭘 좋아했는데요?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주말에, 버스 타고30분쯤 가다가 대충 어딘가에 내려서 가방 내려놓고 책 읽고 그러면 좋았거든요. 아무 생각 안 하고그런데 요즘은 몸은 가만히 있는데 머릿속이 너무분주해요. 문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게 불안이라는데. - P48

맞아요. 성아도 그게 불안이라고, 머리 말고 몸을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하면 그런 불안은사라진대요. 플래너 계약, 웨딩홀 계약, 드레스 예약, 사진 촬영, 신혼집 계약, 이렇게 쭉쭉쭉 가다보면 너무 바빠서 웨딩 업체의 부당한 갈취에서 오는 정확한 분노나 돈만 있으면 더 좋은 걸 할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더 좋은 걸 할 수가 없는 정확한 안타까움만 있고, 구름처럼 뭉게뭉게한 불안은 없대요. 이인삼각처럼 둘이서 그걸 다 해내고 나면 성취감도 든다고. - P49

팀장은 나에게 종종 의욕을 가지라고 말했다.
좀 도전적으로 뭔가 해봐, 모림 씨. 책임감을 가지라고. 하지만 책임감이라니. 양심 정도만 가지면안 될까요? 저는 양심적으로, 실수하지 않기도 힘든걸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네, 노력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또 고개를 끄덕끄덕. 그것도 얼마간의 진심이었다. 이제까지 해온 것과 다르게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회사에서? 나는 하루하루가 이미 무척이나 다르고, 그래서 매번 무척이나 진땀 나고 익숙해지지가 않는데, 사람들은 나를 무척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는 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것만은 모른다. 나에게는 그 반복적인 삶도 가뿐하지 않다는 걸. - P52

동시에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게 실제로 성과를 내는 게 아니라 성과를 내보고자 하는 캐릭터로의 변신이라는 것, 그러니까 기세의 문제라는 것도 조금은 안다. 기세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서른한 살까지의 내 인생은? 지금 나는 아직 세상이 너무 낯설지만 동시에 너무 많이 살아버렸다는 느낌이 드는 구간에 들어선 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2020년대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래의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전에 없이, 누구와 비교해도 영리하고 문명화되었다고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까? - P53

나는 큰 얼음에서 쪼개져 떠내려가는, 그러는동안 계속해서 조금씩 작아지는 얼음 조각에 탄 무리에서 가장 아둔한 펭귄 같다. 가끔 드는 조바심은 그런 것이다. 다른 얼음 조각에 닿을 수 있으면좋으련만. 두 얼음을 꼭 붙여, 녹았다가 얼게 할 수있으면 좋으련만. 조랭이떡 같은 모양으로 붙어 넓어진 얼음 위에서 누군가와 함께 흘러가면 좋으련만.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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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뤼드』의 주인공이 쓰는 글의 주인공 이름은 티튀루스이고 나는 이 인물이 써 내려가는 속마음이 마음에 든다. "나는 티튀루스. 혼자이고, 사색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책처럼 풍경을 좋아한다. 내 생각은 슬프고, 진지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우울하기까지 하니까. 그래서 나는 내 생각을 무엇보다 좋아한다. 그리고내 생각을 산책시키고자 벌판을, 평온하지 않은 못을, 황야를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내 생각을 천천히 산책시킨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두근거린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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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깨어 있으면, 잠의 옷자락 아래 기어들지 못하면...... 쫓기는 마음이 들지 않나? 그러니 비슷하게 눈이 벌건 이들과어깨를 나란히 하고 밤을 새우는 거지. 잊을 수 있으니까, 쫓기고 있다는 걸."
"무엇에 쫓기나?"
"지난날의 과오에 쫓기는 자가 많을 테고, 오지 않은 날들에 쫓기는 자도 더러 있을 테지. 어느 쪽인지만 명확히 알아도 덜 쫓길 텐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긍휼히 여기게 쫓기다 사로잡힌 자들을."
"자네는 어떻게 그 속내를 아나?"
"어른 없는 어린아이가 먹고 살려면 밤의 심부름꾼이 될 때가 있으니 아네. 밤 심부름꾼이 살아남으려면 사람의 무늬를 알아봐야 하고, 어느 바다 어느 땅에 가도 반복되는 무늬가 있다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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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으로서의 자은은 하지 않을 일을, 관직에 있는 자은이라면 망설임 없이 할 것이었다. 거인의 손가락 중 하나이기에 어딘가 구름 속에 있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행했을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큰 힘에 종속되어버렸다. 그 힘을 끌어 쓸수 있는 대신 본연의 모습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스스로만 느끼는 줄 알았더니 곁의 인곤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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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릴라가 신부복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서 속이 뒤틀렸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이번에는 그 대상이 사진이 아니라 카라치 부인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릴라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나를 끌어들였고 니노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 니노는 가위나 풀, 페인트같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망가뜨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 P387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모든 것이 빨리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악몽 속의 괴물들이 내 영혼을 먹어치우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저 암흑 속에서 미친개와 독사와 전갈과 거대한 바다 괴물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바다 끝자락에 앉아 있는 동안 한밤의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내 나를 고문하기를 바랐다.
그렇다. 내 모자람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치르고 싶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 오늘 밤도 내일도 맞이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내 육체의 부적합함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드러날 미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 P405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불현듯 왜 내가 아닌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게 됐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감정에 몸을 내맡길 줄 모른다. 감정에 이끌려 틀을 깨뜨릴 줄 모른다. 내겐 니노와 단 하루를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릴라와 같은 강인함이 없었다. 나는항상 한 발짝 뒤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릴라는 그런 나와는 달리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갈망할 줄 알았다. 원하는 것은 망설임 없이 취할 줄 알았다. 열정을 다할 줄 알았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모멸감도 비웃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흠씬 두들겨 맞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릴라에게 사랑은 상대방이 자기를 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상대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릴라는 니노를 가질 자격이있었던 것이다.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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