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하하하 글쎄요, 저는 기본적으로는 일등이 아니라도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자꾸 세뇌를 받아서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걸 비교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꾸 비교하면서 살면 결국 종착역도 안식도 평화도 없는 끝없이 피곤한 여행이 될 뿐이거든요. 산다는 게. 그래도 외계인 친구가 자꾸 외계의 힘을 써서 불공평한 승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한번 진지하게 말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밑져야 본전인데 요런 대화를 해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친구야 잘 지켜지지는 않지만 인간들에게는 인간의 룰이 있단다. 경쟁은 공정하게. - P116

그리고 고수미는 여러 번 연습한 대로 "나는 정의를 원해"라고 말했다. 니가 뭐든 인간 이상의 힘은 자기 앞에서 쓰지 말라고. 열매는 그 부분에서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산삼을 달라고 했어야지, 그리고 그 돈으로 강남에 땅을 샀으면 지금 재벌이 됐을 텐데. 일생일대의 기회를 그토록 허무한 정의 타령이나 해 날려 버린 걸 보면인생의 고난을 자초한 셈이었다.
열매는 일기장을 다시 나이키 박스에 넣었다. 산삼아니면 자연산 송이 위치라도 알려 달라고 했어야 자기가이 시골에 처박히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기는 그랬다면 수미를 만날 일도 없었겠지. 그러면 열매 인생이 더 불행했을지, 덜 불행했을지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애매했다. - P120

(키보드 두드리며) 할아부지 이 밤은 기냥 여럿 날중에 수두룩 빽빽인 그런 밤이 아니여. 보령 손씨 19대손인 손열매가 가문을 일으키게 되는 밤이여. - P121

유리창에 붙어 있는 다 바랜 영화 포스터들, (종잇장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웃고 사랑하고 키스하고헐벗고 총을 들고 날고 살인하고 비를 피하고 쫓기고 함정에 빠뜨리고 진실을 밝히고 연대하고 충돌하고 전쟁하는 인간들의 얼굴이 인쇄된 세상의 무수한 이야기들을지나 할아버지는 사라졌다. - P124

좋네요.
(씹는 소리 내며) 뭐가 좋은데요?
누군가가 방문해 밥 같이 먹는 거요.
얼마 만인데요?
이것도 한 사백 년 만인가?
그럼 대체 그쪽은 나이를 얼마나 먹었어요? 적어도 사백 살은 넘었다는 얘기니까 반송장이네, 반송장. 진실이 뭔지 알아야 대화를 하지.
진실은 누가 판단내리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역시 흑담즙 철학자답네. 그럼요?
그냥 그 순간 경험하는 거지. - P151

열매는 하루에도 수백 번 마주치는 타인들 모두가 궁금했다. 운동화를 왜 그렇게 구겨 신었는지 어디를 가고 있는지 가면환영받을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는 휴대전화에서는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혹시 ㅎㅎㅎ이나 ㅋㅋㅋ만 찍혀 있지 않는지.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은 열매의 외로움과 관련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런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음을.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가 절대 유기되지 않겠다는 자기 보호로 이끌었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나서는 아주 깊은 외로움이 종일 열매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마음이나 육체, 때론 삶 자체를 소모하고 말아야 끝날 듯한, 익명의 손들에 대책 없이 쥐어지는 거리의 전단지처럼 남발되는 외로움. - P152

열매 씨는 딱 도시에서 온 반건조 오징어 인간들 같아요. 불안과 공포와 의심과 적대와 적의가 압착된 냄새가 나거든요. - P154

모호한 말이었지만 열매는 어디론가 숨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일할 때 영상 속 인물들에게 자기 목소리를내주었던 것처럼. 열매가 연기한 무엇도 현실에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환상이 아니었다. 열매의 호흡과 목소리를 전달받았으니까. - P156

굳이 설명한다면 친교적 조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살아 있는 것들이 살아 있는 것들을 돕고싶어 하는 마음. - P157

어저귀는 숲의 모든 것들은 친교 속에 존재한다고 했다. 나무만 해도 뿌리와 뿌리가 맞닿고 흙 속의 곰팡이가 연결선을 만들면서 안부를 전하고 서로 위급한 신호를 보내고 영양분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자기 몸에서 태어난 어린 묘목을 돌보며 오래된 지혜를 나누어 주는데 숲의 동물들도 그런 나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들이 우주 속에서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지만 인간은 오래전 이탈해 자기들만의 방식을 선택했고 지금이 그 결과라고 했다. 다만 몇몇 인간들은 그런 관계를 시초에 가깝게 유지한 채 존재하는데 어저귀도 그중 하나였다.

어저귀 시초에 가깝다는 게 뭔지 저도 짐작만 할 뿐이지만. 절 키워 주신 감불 아재가 해 주신 말씀이에요. 제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누가 아닌지를 물으라고 질문을 바꾸어 돌려주셨죠. - P157

마치 정지 화면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동안 양미네 집 풍경은 불행하게 멈췄다. 이윽고 율리야와 파드마가 들어와 시디와 가사집과 포스터 들을 줍기 시작했다. 양미는 자전거 옆에서 있었고 표정은 그림자처럼 텅 비어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스위치를 꺼버리는 건 상처받은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는 방어 기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쳐내 버린 감정은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 일렁이는 물결처럼.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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