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형상기억합금 같은 것이 아니어서 아무리 애써도 그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었다. - P103

일요일 오후 그와 단둘이 사무실에 갇혀 있다가 삶이 갑자기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재혼했고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남자친구는 가끔씩 생겼지만, 정희의 얼굴에서 어색함과 긴장이 걷히고 친밀감과 피로가 적나라하게 그 자리를 차지할 즈음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연락을 끊었다. 정희는 자신 곁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숨이 끊어지기 전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게 될 사람이 권이사가 아니라 그들 중 한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정희는 생각했다. - P122

자신의 밥벌이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희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많은 회사들 가운데서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품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곳 한군데가 없다면 그건 세계의 잘못이 아니라 정희의 잘못일 것이었다. 하지만 정희는 부끄러웠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언제나 부끄러웠고, 모두가 입술을 깨물며 참아내는 그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매번 비겁하게 도망쳐나오는 자신이 버거웠다. - P128

파랑이 채 두살이 되기 전의 어느 여름날, 파랑이 들어 있던 하얀 방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터져버렸다. 방이 폭발하는순간 파랑의 몸도 수천개의 물방울이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놀랍게도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 파랑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곳은 조금 더 넓은 방안, 직사각형 모양의 하얀 종이 위였다. 파랑은 액자에 담겨 어딘가의 벽에 걸려 있었다. 피로와 두려움 끝에 긴장이 풀리자 파랑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파랑은 벽 속에 앉은 채 몇년이고 죽음처럼 잠을 잤다.
그리고 다시 그 순간이 왔다. 짱 하는 소리가 나며 유리에 금이갔다. 파랑은 몸이 둘로 접혀 비닐봉지에 쑤셔넣어진 채 어딘가로 한참을 실려갔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종이를 불 속에 던지기 위해 누군가의 손이 비닐봉지를 헤집는 순간 파랑은 처음으로 다리를 크게 움직여 펄쩍 뛰었고, 마침내 종이에서 빠져나왔다. - P130

"현실반대선언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설명했다. 그건 세상에는 하나의 현실만 있다는 생각에 반대해 몇년 전에 제창된 선언이었다. 사람들이 마음을 두고 애착을 갖는 현실은 저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생 동안 매일 스물네 시간 가운데 열여덟 시간을 어떤 드라마를 보면서 보낸다면, 그 사람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현실은 그 드라마 속 세계가 된다. 그것이 책이든, 영화든, 산이든, 장난감 로봇이든, 단전호흡이든 마찬가지다. 그가 마음을 둔 곳이 그의 현실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세계는 하나의 특정한 현실만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해왔다. 그들은 자신과는 생각이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면서 현실로 회귀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를 강요했다. 그 현실이란 건 루시가 속한 세계였다. 배가 고파지고,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 P159

루시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사람들은 더이상 그런 낡아빠진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현실에 현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에 매몰되지 않기로 한 겁니다. 앤서빌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여기가 현실이니까요."
루시는 한참동안 착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알겠어, 그러니까. 내가 낡아빠진 사람이라는 거네. 나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에 가는 현실밖에 모르고, 아, 난 지금은 휴학생이지만, 앤서빌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됐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이름이 좀 세긴 한데요. 현실반대선언은 다양한 현실의 상대성을 인정하자는 게 핵심이지 현실에 무조건 반대하자는 게 아니니까요. 보시면 알겠지만." 나는 손을들어 마천루 꼭대기 근처를 나란히 떠가는 왕과 왕비를 가리켰다. - P160

"저 사람들은 일종의 껍질이지만 현실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나코에%서 통치하고 있지요. 앤서빌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여전히 현실을 필요로 합니다. 슬리퍼를 전혀 벗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예요."
루시가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친구는 내가 현실을 너무 많이 봤다고 하던데."
"여기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단지 주소지가 이쪽일 뿐이죠. 행정상의 문제랄까요. 거기서는 여기의 현실을 보지 않나요?"
"나는...... 전혀 몰랐어. 보고 싶어서 여기 온 거고."
"그렇군요."
"하지만 난 거기 사는데." 그녀는 슬픈 표정을 했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닙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그렇구나. 이제 알겠어. 걔는 나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보는거구나, 영화를 보듯이." 루시는 슬리퍼를 신은 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그렇게 슬픈 일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위로가 될 말을 찾고 싶었다.
"남자친구도 여기 호텔이 있습니까?"
"아니. 응. 아니, 모르겠어. 슬리퍼도 있고, 앤서빌에 온다는 것도내가 알거든. 근데 걔 말로는 자긴 호텔이 없대. 유지가 안된다나. 하긴 걔도 다음 학기에 복학하면 사학년이니까 힘들겠지. 하지만 정말 힘들까? 걘 내 전화를 잘 안 받아. 그런 걸 보면 분명히 호텔에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알려주지를 않아"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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