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생이 끝나면 다음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 어떻게 자라야겠다고 다짐할 새도 없이 자라버리는 시간이었다. 고단한 생로병사 속에서 태어나고 만난 당신들. 내 엄마를 낳은 당신들, 해가 지면 저녁상을 차리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당신들 계속해서 서로를 살리는 당신들.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명력이 그들에게서 엄마를 거쳐 나에게로 흘러왔다. 알 수 없는 이 흐름을 나는 그저 사랑의 무한반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이 나의 수호신들 중 하나였음을 이제는 알겠다. 기쁨 곁에 따르는 공포와 절망 옆에 깃드는 희망 사이에서 계속되는 사랑을 존자씨와 병찬씨를 통해 본다.* - P108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존자에 관한 여러 개의 진실이 시골집 거실에 차곡차곡 놓였다. 마당에서는 배추들이 절여지는 중이었다. - P109
그런 미래가 오리라는 것을 아는 자주 잊는다. 잊은 채로 어떤 슬픔도 없이 복희가 차린 밥을 먹는다. 그렇게 생긴 힘으로. 예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돈을 벌고 가녀장이 되고 잘난 척을 한다. - P147
"폴 발레리가 그랬어요." 복희는 폴 발레리가 누군지 모르지만 묻는다. "뭐라고 했는데요?"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대요.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래요…….." 모든 작품이 체력과 시간과 돈 등의 한계로 어느 순간 작가가 포기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면 슬아의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복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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