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느끼는 고통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귀 기울이며 서로에게 ‘고통의 곁’이 되어주어야 개별적 슬픔이 모여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을 믿으면서도, 상담 선생님께 힘든 마음을 털어놓다가 이런 시기에 갇히 고통이라는 단어의 주어 자리에 제가 잠깐이라도 앉는 게 가당키나 한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갑자기 상담을 끊기도 합니다. - P100

이 일로 걱정의 목적어가 되는 건 고통의 주어일 때보다 몇 배 더 무언가를 훔쳐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래도 될까?‘라는, 슬픔 속에서 어떤 유의 당위나 윤리를 가늠하려는 감정들이야말로 제가 이 커다란 비극의 중심에서 실질적으로는 거리가 먼,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유가족이었을 때 느꼈던 슬픔은 가늠의 여지조차 없는 슬픔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요.
바깥의 사람이라는 이 거리는 온전한 공감을 불가능하게 하겠지만, 이 거리가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하나씩 찾는게 애도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만 하는 시간에서 벗어나서요. - P101

"오늘 너한테 처음으로 절해봤어. 처음 주는 꽃이 국화라서 진짜 미안해" - P102

프로이트가 그랬다죠. 정상적인 애도란 상실한 대상을 잊고 그 대상에 투사한 리비도를 거두어들여 다른 대상에 전이함으로써 애도를 끝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일정시간이 지나도 소멸되지 않고 감정적 애착이 단절되지 않는 애도는 실패한 애도(우울증)라고요.
하지만 제게는 이런 프로이트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이 언제나 더 와닿습니다.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고 그것은 평생 지속되는 것이며, 애도는 실패함으로써 완성되는것이라는, 애도는 실패해야(그것도 잘 실패해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한 말을요. - P103

프로이트의 애도가 고인의 타자성을 지워버리는 ‘망각의 애도‘라면, 데리다의 애도는 고인의 타자성을 내 안에 기억으로 보존하는 ‘기억의 애도‘일 텐데요. 몇 번의 죽음들을 겪으면서, 저는 데리다의 저말은 ‘이해한다‘의 영역이 아니라 ‘(모르고 싶어도) 알아진다’의 영역에 들어가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슬픔은, 그리고 기억은, 아무리 없애고 싶어도 박혀 있는 것이니까요, 가시처럼.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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