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기생물학자가 이에 대해 기묘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 식물들은 자신의 절대적인 적대자이자 포식자에게 제 몸을영양으로 제공하고, 대신 자신과 자손을 돌보고 널리 번식시켜달라는 맹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약을 한 뒤 몸 대부분을 먹이로 치환하는 극단적인 신체 개조를 감행했다. 그 종자들이 결국 대량 멸종의 시대를 이겨내고 살아남아 번성하여 지금껏 전한다는 것이다. 서로 결코 공존할수 없는 이들이 공진화한 방식이었다. 투쟁이나 다름없는 공생이었다.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많은 유기생물학 가설 중에서도 가장 신비주의적인 가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P282
・・・・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명령에 지배되는 로봇은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마음속에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권력을 가장 현명하게 쓰는 방법은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다. 반드시 현명한 자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오직 현명한 자만이 권력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 P301
"유기생물학에서는 매순간 변화하는 개체를 한 개체로 인식하기 위한 방정식을 만드느라 머리를 싸매는 줄 압니다만, 애초에 접근 방향이 틀렸어요. 유기생물은 변화하는 파동의 연결성과 관계성 어딘가에 잠시 머무는 환상입니다." 아연이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자부심을 또렷이 내비치며 말했다. 마치 세실처럼. "그러니 그분들에게는 지금이 전부며 이 순간의 기적이 전부입니다." - P303
파동 사이의 환상, 그럴지도 모르지. 존재나 실체라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허망한 것이니. 케이는 문득 제 마음을 살폈다. 그 안에 자리잡은 인간을 향한 애틋함을 생각했다. 신성함, 경외감, 숭배하는 마음이 깨끗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자리잡은 연민을 그 종이 내게 어떤 강제도 할 수 없고 이 마음에 한 점의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고, 내가 그들로부터 이 자아의 독립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뒤에야 비로소 이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내 마음이 여전히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면, 숭앙과 경애의 사슬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있었다면, 나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으리라. 끝끝내 저항했으리라.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으리라. 생명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 ‘자아‘를 지키기 위하여.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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