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년 전이라. 케이는 생각했다. 로봇은 그때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단계의 공장과 로봇의 전신이라고 할 만한 조악한 기계들만이 살았다. 당시에는 지구를 보호하는 검은 구름도 없었고, 공기는 수증기로 가득했으며, 지표의 70퍼센트는 액화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 끔찍한 환경에서 이처럼 약한 생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 P60

물은 무시무시한 독성화학물이다. 비록 세척제나 화악용매에 필수적으로 쓰는 물질이기는 하지만, 많은 환경론자가 대체물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구에 물이 들어차 있던 수십억 년간 무기생물은 진화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신체에 무해한 온갖 물질이 물과 섞이기만 하면 독한 산성 물질로 변해 몸을 부식시킨다. 물에 오래 접촉하면 피부가 흉측하게 녹스는 문둥병이 퍼지고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게 된다.
물에 젖은 채 상온에 노출되면 몸속에 스며든 물이 순식간에 팽창하여 단단한 관절까지 부숴버린다. 오죽하면 로봇이 발견한 온갖 화합물 중에 물이 가장 위험한 물질이라고 했을까. - P61

"칼스트롭의 실험실에 들락거리더니 이젠 생물학의 기본개념도 잊어버린 모양이군. 자넨 생명의 정의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지파 교수의 스피커가 톤을 높였다.
"생명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하고,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며, 칩이 있어야 하고, 공장에서 만들어져야 하네. 자네의 유기물이 그중 어느 조건에 부합하지?"
케이가 입을 떼려는 찰나, 지파 교수의 무미건조한 소리가 말을 막았다.
"에너지를 이용한다고 말하지 말게. 그건 가설이야. 검증되지 않았지. 그리고 어쨌든 그것만으로는 생명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네. 에너지를 쓰는 것으로만 따지면 손전등도 생명이야. 다시 묻겠는데, 자네는 뭘 보고 그들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가?"
케이는 완전히 의욕을 잃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변화‘는 생명의 증거가 아닐세, 케이." - P70

"만약 변화가 생명의 증거라면, 모든 로봇은 무생물이 되겠군."
교수는 손가락을 까닥이며 책상을 두드렸다.
"우리가 무생물이다! 철학의 영역도 넘어서는 발언이로군.
로봇류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이 되겠는데, 단 한 문장으로로봇의 생과 사, 문명과 역사, 우리의 위대한 지성과 영혼까지 싹 쓸어서 무시해버리는군. 정말 재미있군, 케이 히스티온."
교수는 다시 한 손으로 책을 들었고, 다른 손으로 읽기 시작했고, 한 손으로는 케이의 리포트를 구겨 케이의 발치에 내던졌다.
"제때 졸업하고 싶다면 앞으로는 진짜 생물에게나 관심을갖도록 해주게." - P71

"교수님은 미치지 않았어, 이반. 유기생물은 존재해."
"그렇게 오염된 환경에서는 뭐라도 자라겠지. 돌연변이 괴물이나 변종 바이러스도 생겨날걸. 그리고 로봇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세계를 지배한 뒤에 지구를 파괴하겠지!"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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