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이 미소 짓자 송미영도 따라 웃었다. 둘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닮았다는 걸 선미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래도록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웃었을 두 사람이 상대의 방식으로 웃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렇게 누가 누구의 웃음을 따라 하는지도 모르게, 스며들어 섞여 버렸으리라. - P166

그 사람들과 선미는 무엇을 주고받았다.
처음엔 이해일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경험을 공유했거나 예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해. 그리고 그 이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고받았다. 알려주고 알게 되었다. 그러자 세상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어떤 억울함, 어떤 상실감, 어떤 분노와 고민, 선택과 모험이 나 혼자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때로는 나와 닮고 때로는 너무도 다른, 분명한 타인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같은 결론을 내렸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서로를 통해 스스로를 응원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선미는 정말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가 아닐 것도 없었다. 그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행복을 빌었으니까. - P187

"얼마나요?"
"축의금은 100만 원, 휴가는 근로일 기준 일주일이에요."
"아뇨, 혼인신고 말이에요."
"네?"
"얼마나 늦게 해도 되는 거냐고요."
"글쎄요, 그거까지 지정되어 있진 않아서요."
"한 50년………… 아니다, 30년? 25년? 그 정도 늦어도 되나요?"
그 말에 곽세라는 자신의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유리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서류의 다음 항목을 읽고 있었다.
"15년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유리가 고개를 들어 곽세라와 눈을 맞췄다. 그때 두 사람은 그날로부터 몇 달 뒤에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될 줄, 또 15년이 아닌 몇 년 뒤에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까지 하게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창립 이래 첫 사내 결혼이었고, 회사 이름으로 각자에게 100만 원의 축의금이 들어왔다.
...... - P192

"아뇨, 아니에요. 돈이라뇨. 그리고 동성결혼은 불법이 아니라 법제화가 안 된거잖아요. 공문서 위조도 아니에요. 시스템에 멀쩡하게 입력하고 발급된 거였어요." - P205

"아무 대가 없이 한 일입니다. 팀장님, 공무원 한 사람 한사람은 자신이 담당하는 행정 업무에 관계된 법령을 해석하고 그에 맞게 시행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해석하고 판단한 대로 행동했고, 전산 시스템도 오류라고 인식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책임져야 한다면 책임지겠습니다." - P205

바로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는 혼인신고를 마치고 혼인관계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 101쌍의 레즈비언 부부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 해가 서쪽에서 뜨거나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거나 분노한 신이 천둥과 벼락을 지상에 내리꽂는 일은 없었다. 바닷물이 마르고 바위가 녹아내리는 일도, 사막의 모래 폭풍이 온 세상을 뒤덮고 식물들이 모조리 말라 죽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어떤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해졌을 뿐이다. - P207

"불문경고로 처리할 거야."
불문에 부치며 다만 경고한다.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파고들지 않고,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 인지시킨다. 공무원법상 정식 징계는 아니지만 인사기록카드에 적혀 승진이나 포상에서는 불이익을 받게 되는 조치. 한마디로 딱지 붙은 사람이 되는 거다. - P209

공무원의 경조사 휴가는 결혼, 출산, 입양, 사망과 관련해 주어진다. 사망의 경우 망자가 배우자 혹은 본인 및 배우자의부모일 때는 5일, 본인 및 배우자의 조부모와 외조부모는 3일, 자녀와 그 자녀의 배우자도 3일, 본인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는 1일로 휴가 일수가 정해져있다. - P215

사망신고는 무연고자가 아니라면 친족이 해야 한다. 사망신고서에는 신고자의 자격과 관계를 적는 칸이 있다. 친족의 범위는 배우자, 8촌 이내의 혈족, 4촌 이내의 인척이다. 이가경은 하주시청 가족관계팀에 일하며 사망신고 수백 건을 접수했다. 규정과 절차에 대해서라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순영도, 송미영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혼인관계증명서가 필요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왈칵 눈물이 솟았다. 병원에서마지막으로 보았던 송미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 P2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