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들과 어울려 그들 속에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삶‘을 흉내내려고 애쓰던 선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선미가 왜 떠났는지, 그 이유를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 그 사실에 선미는 안도했다. 분명 그랬다.
하주에 와서도 다르지 않았다. 사생활을 거리낌 없이 나누고 서로에게 간섭하는 것을 애정으로 포장하는 조직 문화가 항상 부담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사에 함께 웃고, 조사에 눈물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부러웠다. 하지만 동료로 만나 친구가 된 이들이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기까지 하는 이들을 볼 때면 더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 애썼다. 차가운 사람, 정이 없는 사람,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 가식적인 사람이라는말을 들으면서 안심했다. 그들과 자신이 다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 P118

"그거면 돼요."
정말요?
정말 그거면 될까요. 보고나면 더 욕심나지 않을까요. 다시 빼앗기기 싫고 억울하지 않을까요. 선미는 손에 들린 포크를, 그 끝에 꽂혀 있는 사과를 보았다. 고작 사과 한 조각도 제 손에 들리면 제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게 사람인데, 손에서 놓쳐 바닥에 떨어진다면 왜 더 세게 쥐고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될텐데. - P127

"일선에서 가족관계등록사무를 처리하며 노고가 많으신 지방행정 공무원 여러분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가족관계등록 사무는 대법원이 관장하되 각 시, 구, 읍, 면의장에게 위임하여 신고나 신청 등 등록 신고를 수리하고 등록부에 기록하는 사무와 증명서를 발급하는 사무, 장부 정리와 감독법원의 송부 사무를 처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감독법원인 우리 법원에 신고 장부와 신고서를 송부하고 시정사항 및 개정된 법규를 교육받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신고서는 다들 제출하셨지요? 그럼 지금부터 이달의 교육 내용을 소개드리겠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1. 시정조치 사례‘라는 글자가 떴다. 첫 번째로 A시 G구에서 신고서를 접수받는 공무원이 사망신고서의 내용을 잘못 확인하여 사망자인 어머니와 신고자인 딸의 정보를 반대로 전산에 입력한 사례가 소개되었다. 다행히 내부 결재 과정에서 발견되어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했다.
"해당 공무원은 사망자와 신고자가 한 가구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혼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점을 주의하시고 각별히 챙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P147

해당 외국인은 서류상 미혼으로 기재된 나라에서 국내 혼인신고에 필요한 서류들을 발급받았기에 아무런 문제 없이 국내에서 혼인신고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이중 국적자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배우자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던- 타국에서 기혼 상태인 것을 발견하여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방송이나 기사를 통해 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이 외국인이 의도적으로 사기 결혼을 하려 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례를 통해 혼인신고 접수시에 이중국적자 및 복수국적자의 경우 국적을 가진 모든 나라에서 미혼증명서를 발급받아야만 접수가 가능하도록 법률개정이 필요할지 논의 중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사무관은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적인 관심이 쏠리고있으니 당분간 국제결혼의 혼인신고를 접수받을 때는 주의를기울여달라고 덧붙였다. - P149

"이 역시 잘 아시다시피, 국내에서 동성간의 혼인신고는현행법상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에 불수리를 원칙으로 하고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신고서를 접수 후 신고자에게 불수리 통지서를 전달하는 것으로 매뉴얼 교육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O읍 행정복지센터의 담당 공무원은 미처 교육을받지 못한 신규 임용자로 몹시 당황하여 서류 접수 자체를 거부하여 신고자와 실랑이를 하게 됩니다."
스크린에는 커다란 글씨로 몇 개의 단어들이 띄워졌다.
동성 결혼은 불법.
혼인신고에 반대.
혼인신고서 제출은 업무 방해 행위.
사무관은 말없이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짧게 마른세수를 했다.
"해당 공무원은 개인의 사견과 독단으로 신고자에게 보시는 바와 같은 발언을 하였는데, 이 모습이 당시 행정복지센터에 있던 다른 주민에 의해 동영상으로 촬영되어 인터넷에 유포되었고 해당 지자체로 항의 민원이 빗발쳤습니다."
사무관은 이 속한 C시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해당 공무원의 문책과 징계를 촉구하는 내용과 신고자들을 향한 인신공격성 비난이 뒤섞여 한동안 혼란스러웠다고 덧붙였다. 스크린에 띄운 O읍의 공무원이 했던 발언들 위로 C시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들이 더해졌다. 선미는 스크린의 글자들이 마치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는 활 같다고 느꼈다. 영원히 화살이 떨어지지 않는 활. 끊임없이 시위를 당기고, 다시 당기고, 또 당기는 활. 당장 단상으로 달려가 날카로운 칼로 스크린을 갈기갈기찢어버리고 싶었다. - P151

고등학생 시절, 선미는 자주 앨범을 펼친 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사진 속 어린 자신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힌트를 찾듯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과거의 결정적 사건을 발견하려는 듯이. 그러면 모든 수수께끼를 푼 탐정이 되어 범인을 잡아 낼 수 있을 것처럼.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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