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을 300장씩 돌려서 결혼식을 열고 신혼여행은 발리로 다녀왔어. 나 그때 축의금도 10만 원이나 냈잖아. 결혼식 전에 혼인신고 하고 신혼부부 특별 공급으로 아파트 분양받았으면서 자기 남편이 동거인이래. 그냥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래. 그러면 뭐 되게 쿨하게 보일 줄 아나? 진짜 웃기고 있어. 프로필 사진도 웨딩 사진이면서!" 은경은 비웃듯이 말을 꺼냈다가 점점 화를 내더니 결국 울먹였다. 얄밉고 분하다고, 약이 오른다고 했다. 그 사람이 동거인이라고 자신의 남편을 칭할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 단어가 남편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사람에게 동거인이라는 말을 빼앗긴 친구가 동성 연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걸 그 사람은 모른다고. 그 사실이 은경의 마음을 시시때때로 비틀리게 한다고 했다. - P94
"선택할 수 있다는 거,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권력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잖아." 은경은 친구가 자신의 연인을 동거인이라고 표현할 때, 그말에는 분명 자조가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연인 관계를 가장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고작 동거인일 때, 그럼에도 그 말이 아무것도 속이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들, 영영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고. - P95
선미도 알았다. 레즈비언만 가입할 수 있는 사이트에 자기소개를 올려서 만난 사이, 다른 레즈비언 친구에게 소개받아 만난 사이, 서로를 알아보고 정체성을 고백해 만난 사이. 그런사이를 연인이라고 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에둘러 친구나 룸메이트, 사이좋은 언니 동생이라고 포장해야 할 때 반발심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니 동거인이라는 ‘증명‘할 수 있는 단어로 둘 사이를 표현하면서 느끼는 안도감은 당연히 열패감을 동반할 수밖에. 싸움인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매번 질 수밖에. - P95
혼인신고의 처리 절차는 가경이 가족관계팀으로 발령받고서 제일 먼저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창구에 혼인신고서가 들어오면 누락된 곳이 없는지, 신고자가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살핀다. 다시 작성해야 하는 곳이 있으면 신고자에게 상세히 안내한다. 신고서에 이상이 없으면 전산 시스템에 해당 내용을 입력해 접수 창을 채운다. 입력이 완료되면 ‘접수‘ 버튼을 누른다. 접수된 순서대로 신고서 원본을 정리한다. 거기까지가 가경이 맡은 접수 업무였다. 접수가 완료된 신고서는 ‘기록‘ 단계로 이관된다. 가족관계팀의 차석이 담당하는 일이다. 하루 동안 접수된 신고서가 다음 날 차석에게로 전달된다. 차석은 접수된 신고서에 이상이 없는지, 제대로 전산에 입력이 되었는지 다시 확인한다. 문제가 없으면 ‘기록‘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하루 동안 기록된 신고서들을 그다음 날 팀장이 최종 결재한다. - P105
최종 결재가 되면 혼인신고 절차가 마무리된 것이고 혼인관계증명서가 발급된다. "접수도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될것 같더라고요. 일단 접수가 되면 기록 버튼을 눌러줄 사람, 결재할 사람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 기록 버튼을 눌러줄 사람이 나군요." 선미는 가경의 계획을 이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계획의 허점도 깨달았다. "내가 기록한다고 해도 팀장님이 결재하셔야 해요. 설마 팀장님도 끌어들이겠다는 건 아니죠?" "팀장님은 휴가 때면 차석에게 대결을 맡기고 가세요. 다음주에 사모님 수술 때문에 사흘 동안 휴가 가시고요." 가경이 예상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에 선미는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 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한다고 쳐요. 하지만 내가 대결해서 결재까지 한다고 해도 월 점검 때 걸릴 거예요." 시청에 접수된 혼인신고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원본을 모아 가정법원에 제출한다. 혼인신고서뿐만이 아니라 가족관계팀에 접수되는 출생신고서, 사망신고서, 이혼신고서 모두 그렇게 한다. 가족관계 등록 업무는 원래 가정법원의 일이고 지방 자치 단체에위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 P106
하주시청 가족관계팀은 매달 첫 번째 목요일마다 지난달에 접수된 신고서를 들고 관할 가정법원에 가서 제출하고 업무 관련 교육을 받았다. 그 제출 전에 한 달 치 신고서를 다시 들여다보며 전산 시스템에 실수가 없었는지 살피는 것이 ‘월 점검‘이었다. 월 점검은 접수와 기록을 담당한 직원이 아닌 다른 직원이 맡았다. "그거면 돼요." "그거면 된다고요?" "결재까지만 되면 혼인관계증명서는 발급받을 수 있잖아요." "그건 아무런 효력이 없는 문서가 될 거예요." "그래도 그 순간엔 진짜잖아요." "진짜를 가졌다가 잃으면, 그렇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두 분께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월 점검 때 그 기록이 발견되면 바로 ‘직권정정‘ 될 것이다. 혼인은 무효가 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아뇨. 예전과 같지 않아요. 정정 기록이 남잖아요. 두 사람이 짧게나마 혼인관계였다고. 그런데 그게 무효가 되었다고. 정정을 하면 무엇을 정정했는지 밝혀 적어야 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기록하는 거. 그게 대한민국 행정이잖아요."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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