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보내주신 편지에서 새 연재작 ‘사람의 일생을 그리자‘ 이야기를 듣고 무척 흥분했습니다. [인간 임종 도권]이라는 책을 알게 된 것도 너무 기쁩니다. 몇 년 전부터 제가 만들고 싶은 얘기 중에 엑스트라 시리즈가 있는데요,
영화에 나와서 한 3초 만에 죽거나 사라지는 엑스트라의 일생을 돌아보는 게 내용입니다.
영화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누군가를 구출하기 위해 어느 빌딩에 잠입한 뒤, 굳게 닫힌 문을 지키던 경호원 한 명의 목을 휙-꺾어버리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주인공에게 목이 꺾여 쓰러지는 모습이 전부이지만, 영화에 나오는 3초 외에 그 경호원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궁금하더라고요. 이를테면(너무 길어지니 어린 시절은 생략할게요) 그는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가 될 걸 희망했지만 애매한 성적으로 체육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사람입니다. 졸업한 뒤 일자리를 찾던 그는 선배가 운영하는 운동센터에서 강사로 일하게 됩니다. - P131

하지만 월급이 그리 많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찾던 그는 야간 경호원 일자리를 발견했지요. 그는 저처럼 집을 사고 싶었던 걸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덜 자더라도 빨리 돈을 모으고 싶었던 거겠죠.
체육대학과 운동센터에서 일할 때는 항상 운동복만 입었는데, 경호원 일에는 정장이 필수였지요. 첫 출근을 하기 전, 그는 적당한 가격의 정장을 찾기 위해 몇 주 동안 상점과 인터넷 쇼핑몰을 헤맸습니다. 첫 출근 날, 새 정장을 입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거울 앞에 선 그는 자기 모습에썩 만족했습니다. 업무는 간단했죠.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어느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으면 됐습니다. 무섭게만 보이던 선배들 중에는 같은 체육대학 출신도 있었기에, 앞으로 일하면서 도움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생겼습니다. 경호 일은 비밀 엄수가 중요해 어디서 일을 하는지 공공연하게 알리면 안 되기에, 그는 거울 앞에 선 자기 모습을 찍으려다 말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습니다. 업무 시작에 앞서 간단히 몸도 풀고 몇 가지 호신술 동작도 해본 뒤, 오늘 하루 자신이 지킬 문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자리를 잡고 선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요. - P132

조용한 로비 한구석에서 쉭- 인기척이 들린 것 같아 몸을 돌리려던 찰나, 우두둑, 누군가에게 목이 꺾이고 그는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
영화에서 이렇게 사라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특히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주인공 한 명의 목표를 위해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희생됩니다. 언젠가 한 미국 드라마에서 몇명의 엑스트라가 주인공에게 희생되는지를 기록한 웹사이트를 찾은 적이 있어요. 기록에는 드라마 주인공이 총 8일동안 267명을 죽였다고 하네요. 웹사이트에는 드라마 몇분 몇 초에 누가 어떤 방법으로 주인공에게 희생되는지가 장면 사진과 함께 기록돼 있어요. 희생자에게 역할 이름이 있을 때도 있지만 총을 든 남자 1, 군인 1, 경호원 1, 이렇게 적힌 사람들도 많습니다. 전 그렇게 1, 2, 3으로 번호 매겨진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고요.
엄마, 아빠로 이름 붙여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더 잘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요? 제게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좋아하던, 혹은 사랑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게 어릴 때부터 상상이 잘 안 됐어요. - P133

그레이버도 말했듯 세상을 바꾸는 열쇠는 젠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명백한 부권사회고, 이런 부권사회를 만드는 건 가정입니다. 모든 차별과 혐오는 가정에서 생겨나지요. 가정이란, 그 히에라르키 (성직자의 세속적인 지배 제도)의 정점에 아버지가 서 있고, 그 아래에 어머니와 아이가 있는 도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도식이곧 사회의 도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단한 놈들이 하나같이 ‘아저씨스러운‘ 거겠죠.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부권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그 이유는 전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없다면 그 어떤 세계에서든 부권사회는 붕괴될 겁니다. - P207

그러니 전쟁만큼은 절대로 해선 안됩니다. 평화가 지속되면 부권사회는 약화되고, 새로운 사회가 대두될 거예요. 바라건대, 그 새로운 사회가 모권사회였으면 하는 것은 비단 제가 마마보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부권사회가 모권사회로 변하면 그야말로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질겁니다. 왠지 모르게 모권사회가 부권사회보다 가난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새롭게 탄생하겠죠. 사실 가장 좋은 건 부권도, 모권도 아닌 사회겠지만, 우선은 모권사회의 실현을 보고 싶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날이 오기는할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제가 마음속에 그리는 ‘지금과 다른 세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P208

1년 넘는 시간 동안 이가라시 상에게 편지를 쓸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이가라시 상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일을 영원히 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무당친구 칼리 말로는 삶과 죽음은 나누어져 있지 않고 이승과 저승이 지금 여기에 함께 존재한다고 합니다. 신과 소통하는 칼리에게는 그런 세상이 보인다고요. 지금 당장 저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말대로 이승과 저승이 이곳에 다 함께있는 거라면, 많은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가라시 상과 저, 둘 중 한 명이 먼저 저승으로 간다고해도 우리는 계속 연결될 수 있겠네요. 혹시 제가 저승에서 편지를 보내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세요. 어디서라도 즐거운 편지 주고받기를 이어나갑시다. - P243

하지만 저는 그런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야말로 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 귀한가 하면, 저에게 귀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귀하며, 고난을 겪고 있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귀합니다. 고난을 겪을 때일수록 자신이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기를. 무엇보다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프라이드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 P248

신과 악마, 이름의 관계도 재미있네요. 그러고 보니 영화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1973)의 악마 역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싫어했죠. 자기의 이름이 불린다는 자체가 신보다 나중에 태어났거나 신에게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P249

이랑 씨는 고양이 준이치를 뭐라고 부르나요? 저는 우리집 고양이에게 ‘가루‘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핸드폰으로사진을 찍으면 실제보다 조그맣게 찍히는 게 재미있어 점점 더 작게 찍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조그만 아이(小小者, 치이사이 모노)‘라는 의미로 "치이사키"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이 어떻게 번역될지 염려스럽지만) 발음이 마치 사투리처럼 바뀌어 ‘츠부사키‘가 되는 바람에 지금은 일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의미불명의 이름이 되었어요.
그런 저를 보고 아내는 "당신, 처음 가루를 만났을 때는 그렇게까지 예뻐하지 않더니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면서부터 푹 빠지기 시작했어"라는 말을 하더군요. 이름을 짓는다는 건 참으로 무시무시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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