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신과 연결되는 첫 번째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신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고요. 반대로 서양에서는 악마가 스스로 이름을 외치며 인간의 몸에서 도망친대요. 엑소시즘을 다루는 영화에서 퇴마사가 여러 번 이름을 물어도 악마가 자기 이름을 애써 숨기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이름을 부르면 다가오는 신과, 자기 이름을 외치며 도망치는 신이 있다는 그 차이가 신기했습니다. - P236

저는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신이라면 그 누구보다 더욱배려심과 이해심이 있을 테고, 그렇다면 편협하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지옥을 만들 리 없다는 게 제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비판하는 이야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친구에 비해 저는 좀 더 신나게 떠드는 편이었지요. 언젠가 친구가 이 세상은 커다란 프로그램일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그렇다면 신은 프로그래머?). 아주 복잡하게 코딩되어있는 프로그램일 거라고요. 또한 이 세상이 프로그램임을눈치챈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바로 무당일 거라고하더군요. 그 말인즉슨 무당은 프로그램 설계자와 약간이나마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데요……… 그 말을 듣고 나서 무당이 되고 싶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역시 아닌 거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 P72

아들이 성소수자임을 숨기고 싶어 했던 목사 집안에서치른 장례식은 평범한 크리스천 스타일이었습니다. 친구의 오랜 파트너는 상주 역할을 맡을 수 없어 신발장 앞에서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저는 장례식 내내 부조금받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부조금을 받는 자리에 앉아 조문객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당연하겠지만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부조금 봉투를 건네주는 사람들 면면이 다 달랐거든요. 그들이 책상에 앉아 일하는 저를 대신해 크게 울고 크게 웃어주는 것 같아 저는 긴 시간 울지않고 앉아 있어도 괜찮았습니다. 그의 가족이 아무리 평범한 교회 스타일 장례식을 차려놓았어도 찾아온 사람들이입고 온 티셔츠에는 친구와 함께 퀴어 퍼레이드에서 외치던 문구가 쓰여 있었고, 가방에는 무지개 배지와 천사 날개를 단 성소수자 캐릭터들이 날뛰고 있었습니다. 수백 명의 조문객들이 옷, 헤어스타일, 가방, 신고 온 신발로 각자의 색깔을 뽐내고 있었기에 장례식장이 마냥 검지만은 않았습니다. - P73

친구의 장례식에서 신기했던 건 그가 거쳐온 인생의 매시기마다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35년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1년 단위로 쪼갰을 때, 그의 1년 1년이 어땠는지 그려볼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신기했습니다. 더욱 신기한 건, 그 여러 시기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대학생 때도, 사회에 나와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출판사에서 일할 때도, 퀴어 잡지를 만들면서도, 취미로 디제이를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는지 신기했습니다. 모두 그와자신의 관계가 소중하고 깊었다고 자신했고,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그는 그가 믿었던 신보다 더 많은사람들과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에게는 기도하고 또 해도 어째 내 얘기를 듣고 있다는 느낌이 나지 않는데 말이에요. - P74

장례식에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자신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했는지 입을 모아 얘기하는 것도 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기억하는 친구의순간순간들을 모으고 그 이야기를 한꺼번에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글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뭐든 간에요.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모두 한자리에모이는 건 위험하니 가까운 친구 몇몇이서 진행을 맡고,
미리 받아둔 글을 대신 읽어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디어가 오가던 중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말‘을 모으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어떤 친구는 ‘빨리 내놔‘가 그에게 받은 마지막 문자였고, 저는 ‘헉 잘못 보냈다 미안‘이그에게서 온 마지막 문자였습니다. 마지막 말인데 실수로 다른 데 보내려던 문자를 제게 보냈다니 웃기네요.

5년 전, 병명을 알 수 없는 전신의 통증으로 몇 년간 고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공통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 그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를 찾아봤습니다. 제가 보낸 마지막 문자는 ‘콜라사 와‘였고, 다른 친구가 보낸 문자는 ‘렛츠 파티‘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지막 문자가 얼마나 하찮은지 비교하며 웃고 울었습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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