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뭔지 알아, 에스더?"
"아니, 뭔데?"
내가 묻겠지.
"먼지."
그가 미소 지으면서 으스대는 표정을 짓기 시작하면, 나는 말하리라.
"네가 해부하는 시체도 마찬가지야. 네가 치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들도 다 먼지에 불과하다고. 훌륭한 시는 그런 사람들 백 명을 모아놓은 것보다도 훨씬 오래 남지."
물론 버디는 그 말에 대꾸하지 못할 터였다. 내가 한 말이 사실이니까. 사람들은 먼지 덩어리에 불과했고, 그런 먼지 덩어리를 치료하는 게 시를 쓰는 일보다 뭐가 대단한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불행하거나 아프거나 잠을 못 이룰 때면 시를 기억하고 외우지 않던가. - P80

"아가씨는 보면 안 되는데요. 아기를 낳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분만 광경은 여자들한테 보여주면 안 돼요. 그랬다간 인류가 멸종할 거거든요." - P92

산모의 배가 워낙 불러서 얼굴이나 상체가 보이지 않았다.
산모는 남산만한 배와 높은 발걸이에 매달린 흉한 긴 다리만 붙은 사람 같았다. 출산하는 내내 인간 같지 않은 낑낑대는소리를 토해냈다.
산모가 통증을 잊는 약물을 투약 받았다는 얘기를 나중에버디에게 들었다. 욕설을 퍼붓고 신음을 하면서도 반마취 상태라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 것은 남자나 만들 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모든 걸 느꼈을 터였다. 무감각했다면 그렇게 신음하지 않았겠지. 그런데 그녀는 집에 돌아가기 무섭게 또 아기를 가지려 할 터였다. 진통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약이 잊게 할 테니까. 사실 그녀의 은밀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문도 창문도 없는 고통의기나긴 복도가 열렸다가 다시 그녀를 가두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P92

버디가 어머니에게 그렇게 불손하게 말할 리가 없다는 것을 난 알았다. 그가 늘 "남자가 원하는 것은 반려자이고 여자가 원하는 것은 끝없는 안정감"이라거나 "남자의 인품은 미래로 날아가는 화살이고 여자의 인품은 그 화살을 쏘는 시위"라는 어머니의 말을 읊어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니까. - P100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는 동시통역사 콘스탄틴과 관용어구를 많이 아는 러시아 여자 사이에 앉아 있으니 내가 끔찍하게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늘 부족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 특기는 장학금 따기와 상 타기였는데 이제 그것도 끝나가고 있었다.
경마장이 아니라 거리에 던져진 경주마가 된 기분이었다.
대학 우승자인 풋볼 선수가 양복 차림으로 월스트리트와 마주 선 느낌과 비슷했다. 트로피에 새겨진 날짜는 묘비의 날짜와 다름 없었다. - P106

내 인생이 소설에 나오는 초록빛 무화과나무처럼 가지를 뻗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가지 끝마다 매달린 탐스러운 무화과 같은 멋진 미래가 손짓하고 윙크를 보냈다. 어떤 무화과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과 아이들이었고, 어떤 것은 유명한 시인이었고, 또 어떤 것은 뛰어난 교수였다. 훌륭한 편집자라는 무화과도 있었고, 유럽과 아프리카와 남미인 무화과도 있었다. 어떤 것은 콘스탄틴, 소크라테스, 아틸라 등 이상한 이름과 엉뚱한 직업을 가진 연인이었다. 올림픽 여자 조정 챔피언인 무화과도 있었고, 이런 것들 위에는 내가 이해 못하는 무화과가 더 많이 있었다.
무화과나무의 갈라진 자리에 앉아, 어느 열매를 딸지 정하지 못해서 배를 곯는 내가 보였다. 열매를 몽땅 따고 싶었다.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결정을 못하고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무화과는 쪼글쪼글 검게 변하더니 하나씩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 P107

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멀리 있을 때는 결점 없는 남자라 여기지만, 가까이 다가오기만 하면 그 정도 남자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닫곤 했다.
결혼하고 싶지 않은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무한한 안정감을 갖추고 화살을 튕겨내는 시위 따위는 결코 되고 싶지않았다. 나는 변화와 짜릿함을 원했고, 나 자신이 사방으로튕겨 나가고 싶었다. 독립기념일에 로켓에서 쏘아 올리는 색색의 화살처럼. - P114

십오 년 동안 A 학점만 받은 여자에게는 끔찍하고 낭비적인 삶으로 보였지만, 나는 결혼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버디의 어머니가 아침부터 밤까지 하는 일이 바로 요리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거였으니까. 그녀는 대학 교수의 아내였고, 전직 교사였다.
한번은 버디네 집에 가보니 윌러드 부인이 남편의 낡은 모직 양복을 잘라서 깔개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몇 주 동안 깔개에 매달렸고, 난 갈색과 초록색, 파란색이 패턴을 이룬 깔개에 감탄했다. 부인은 깔개를 완성하자 부엌에 깔았다. 나같으면 벽에 걸었을 텐데. 며칠 지나자 깔개는 물에 젖어 엉망이 되어서, 할인 상점에서 1달러도 안 주고 살 수 있는 매트랑 다름없어졌다.
또 나는 알고 있었다. 결혼 전에 남자는 장미며 키스며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퍼부으면서도, 속으로는 결혼식만 끝나면 여자가 윌러드 부인의 부엌 매트처럼 자기 발밑에 납작 엎드리기를 바란다는 것을. - P116

아버지는 리노(네바다 주에 있는 도시로 이혼이 쉽게 허용되는 것으로 유명하다)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기 무섭게 —아버지는 유부남이어서 이혼부터 해야 했다 —엄마에게 말했다지 않던가.
"휴, 이제 억지로 꾸며 행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되니 마음이 놓이지?"
그날부터 엄마는 단 일 분도 평온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또 버디는 뻔히 알지 않느냐는 듯 못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아이를 가지면 느낌이 달라질 거라고, 그때는 시를 쓰고싶지 않을 거라고. 여자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가지면 세뇌가 되고, 나중에는 전체주의 국가에 사는 노예처럼 둔해지는 게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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