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곤이 보기에 진석은 그저 조금 말이 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물론 수식어를 약간 늘릴 수는 있었다. 독특하고희귀한 취향을 가진 내성적인 아이. 하지만 진석의 동료들, 그러니까 다른 알바생들은 그런 진석을 그저 한 단어안에 몰아넣기에 급급했다. 아싸. 그게 전부였다. 그 새끼 완전 아싸잖아, 기분 나빠. 우연히 엿들은 대화에서 성곤은 갑갑함을 느꼈다. ‘아싸‘라는 말로 규정되는 순간 진석의 모든 것들은 그 두 글자 안에 구겨 넣어져 ‘불쾌함‘이라는 결론으로 한달음에 치달았다. 색으로 치자면 진석은 밝은 쪽에 속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 애는 회색이었다. 하지만 진한 회색, 연한 회색, 베이지가 섞인 회갈색, 때론 대리석처럼 빛나는 영롱한조각을 품은 다채롭고 신비한 회색이었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그 오묘함 앞에 아싸,라는 단어가 폭군처럼 나타나 이 애는 들여다볼 필요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하며 단정 지었다. 그 말 앞에서 진석은 그저 무의미하게 말라비틀어진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 P98
또, 성공적인 칭찬을 수행하기 위해선 붙임성과 순발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야 했다. 호의로 가득 찬 마음 위에 올라서서 칭찬이라는 공을 꽉 쥐고 있다가 대화 중의 적절한 빈 공간에 재빨리 던져 넣어야 했다. 실로 엄청난 기술이었다. 가장 큰 난관은, 칭찬이란 상대의 평가를 통과해야 비로소 진정한 칭찬으로 결론 난다는 점이었다. 의도야 어쨌건간에 상대가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칭찬이 되는 귀찮고 까다로운 절차. 그러잖아도 지겹도록 남의 평가에 시달리는 인생에 그런 기술까지 갖춰야 하나. 타고난 아첨꾼이 아닌 이상 칭찬으로 남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효율이 너무 떨어졌다. 그래서, 스스로 세운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김성곤은 입에서 모래를 뱉어내는 기분으로, 혹은 숙제를 처리하는 기분으로 이 계획의 실행에 임해야 했다. - P136
성곤의 발화는 주로 ‘대’와 ‘래‘로 끝났다. 이게 돈이된대. 그 투자처가 정말 믿을 만하다. 손만 대면 완전 대박보장이래, 꽃 한송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조차 그의머리는 그 꽃의 노랗거나 빨간 부분에서 추출한 어떤 성분에 투자가치가 있다는 식의 말에만 반짝반응했다. 사업가적 마인드에서는 필요한 관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효용과 쓸모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는 그에게서 점차 중요한 어떤 것들을 퇴화시켰다. 김성곤 안드레아는 차츰 감탄하는 법, 놀라는 법, 사물과 세상을 목적 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법을 잊어갔다. 그런 걸 잊은 사람에게서 진정한 미소나 여유 같은 게 우러나올 리가 없었다. - P152
아영이는 뭐든 할 줄 아는 아이였다. 방바닥과 뺨의 단순한 협주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웃음소리를 낼 줄 알았고,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마루 위에 만들어낸 무지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줄도 알았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잡으며 튕겨져나온 작디작은 물방울들을 보석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오렌지를 코에 대주면 그 오묘하고 달콤한 향에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아영이의 웃음소리는 성곤의 마음을 대번에 활짝 꽃피게 했다. 그 웃음소리를 위해 성곤은 목숨을 바칠 수도 있었다. - P154
삶이 다채로운 맛과 향으로 구성된 서랍장이라면 성공은 계속해서 한가지 서랍만 열고 있었다. 분노, 짜증, 울분, 격분, 우울, 좌절이 가득 담긴 서랍 어느새 그는 다른 서랍을 여는 방법을 망각했다. 참다운 기쁨, 단어 안에 담아놓기 힘들 정도로 충만한 감정이 담긴 서랍은 꾹 닫혀 있었고 이제는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 P155
그러나 한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숨겨뒀던 서랍을 찾아 열어야만 잃어버린 영혼도 되찾을수 있다는 것, 그래야만 그의 표정과 말투, 남에게 건네는칭찬에 진심이 실릴 거라는 것을. 그러므로 김성곤은 자신이 어딘가에 하찮게 유기한 감각들을 다시 불러내 사용법을 익혀야 했다. 걸음마를 처음 떼는 아기처럼, 순수하고 새롭게.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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