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긴 세상의 모서리였어. 이 뾰족한 끄트머리에조차 붙어 있지 못하게 되면 더는 서 있을 곳이 없는 그런 곳. - P341

아마도 네 성별이 달랐더라면 이런 이야기가 나돌지는 않았겠지. 그런 말들과 마주할 때마다 너는 엄마를 떠올렸다.
매일 악플과 계란 세례에 시달리는 기분이 이랬겠구나. 엄마는이런 싸움을 했던 거구나. 너는 최선을 다해 태연한 표정을 연기했지만, 솔직히 서글픈 티가 났다.
네 지지자들이라고 해서 꼭 네 편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마음속에 품은 ‘완벽한‘ 구세주의 모습을 네게 덧씌운 뒤 멋대로 네 존재를 망상했다. 자신들의 그 완벽한 기준에서조금만 벗어나도 애정 어린 조언이라는 이름의 제재가 가해졌다. 네 옷매무새가 조금만 틀어져도, 말투가 조금만 달라져도, 순수해 보여도, 순수해 보이지 않아도, 계산적이어도, 계산적이지않아도, 화장을 해도, 화장을 하지 않아도 모두 문제가 되었다.
너는 어떤 사람들에겐 ‘동양의 신비로운 소녀‘ 여야 했고, 어떤사람들에겐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 여야 했다. 기성 정치인처럼 세련되어야 했지만, 동시에 기성정치와는 담을 쌓은 언더독처럼 보여야 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논리로 상대를 이겨먹어선 안 되었다. 왜냐면 그건 ‘리더로서의포용력이 부족한‘ 행동이니까.
어떤 사람들에게 너는 그저 예비 신붓감일 뿐이었다. 그것도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딱지가 붙은 그들은 네 외모와 성격은 물론 별자리와 혈액형과 MBTI까지 따져가며 네가 누구의 신부로어울리는지 가상의 짝짓기 놀이에 몰두했다. 대체 왜 너의 요리실력 같은 걸 궁금해할까. 평생 네 눈길 한번 끌지 못할 머저리들 주제에 어찌나 다들 자기 성적 매력을 과신하는지, 한심한 멘트로 널 유혹하는 오빠들만 모아도 작은 나라 하나는 건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368

네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는 숨 막히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때 이랬어야 했다. 저랬어야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훈수만 늘어놓으며 네 발언의 아주 일부만을 잘라 끝도 없이 조리돌림했다. 결과를 놓고 한마디 얹기란 너무나 쉬운 법이어서, 사람들은 마치 아침 체조 하듯 몸풀기로 너를 품평하곤 했다.
누군가 네 영상 속 한 장면을 캡처해 비난하는 자막을 달고 소셜 페이지에 올리면 그 페이지를 본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소셜 페이지에 옮겨 붙인 뒤 비난을 한 줄 추가했다. 비난도 복사가 되다니. 수를 헤아릴 새도 없이 빠르게 복제되는 냉혹한 손가락들이 너를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잡아당겼다. 너는 마치 심해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우습게도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강수진 뿐이었다. 모두로부터 멀어진 네게 강수진은 네 입장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날 역시, 강수진은 침울해하는 네 얼굴을 보자마자 위로의 말부터 건넸다.
"신경 쓰지 말아요. 사람들은 원래 한심하니까. 세상은 원래 촌스러운 사람들의 추태로 넘쳐나는 겁니다."
"그래도 조금쯤은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강수진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너는 흠칫 놀라며 내 눈치를 보았으나,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모두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버리세요. 그건불가능한 소망이니까."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서로를 파괴하고 말 거예요. 두려우니까." - P369

"그래서 세상이 안 바뀌었나요?"
"... 충분하지 않아요."
"알아요. 충분하지 않다는 거. 그래도 아이들은 섬 밖으로 나왔잖아요. 그 변화는 돌이킬 수 없어요. 한 번 풀려난 아이들은다시는 섬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그 아이들은 자유를 아는어른으로 자라날 테고,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죠. 미약하지만 한 걸음 전진했어요. 다음 싸움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거고요.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요? 지금 당장 우리는 어쩌고요?"
강수진은 한숨을 쉬었다.
"화경 씨는 어떤 때는 하태빈 씨 같다가 어떤 때는 조유영 씨같군요. 대체 둘중에 어느 쪽입니까?"
"둘 다 옳은 걸 어쩌라고요."
"아무튼 제 말은 화경 씨가 전부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이건 수도 없이 반복되어 온 여정이에요. 세상은 이미 수천 번 열차를 갈아타며 여기까지 온 거라고요. 하지만 종착역까지 단숨에 도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 차를 세워요. 짐을 내려놓으세요."
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운전대 뺏겼어요." -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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