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온 게 왜 내 탓이야? 누가 무녀로 태어나고 싶었대? 안 해! 놓으라고!" "무녀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요괴에게 단단히 홀렸군." "수아 님은 요괴가 아니야!" "가망이 없어. 안 되겠다. 안타깝지만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다님과 하늘님께 제물로 바쳐야겠어. 묶어라." "그냥 이대로 자빠뜨려 애를 배게 하는 건 어떨까요?" 자신의 몸을 훑는 남자의 시선이 일렁이는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놔, 싫어, 뭐 하는 거야!" "땅이 썩었는데 어찌 좋은 싹이 나올까." "그럼 이제 기원은 어떻게 드리지요?" "저 계집을 태워서 얻은 재를 마신 임부가 아기를 무사히 낳으면 그 아기가 다음 대 무녀가 된다. 마침 애를 배고 있는 이가 둘이나 있으니 둘다에게 먹여 보면 되겠지. 걱정 말거라." "웃기지 마, 이렇게는 못 죽어, 안 죽어." "이렇게라도 남은 이들에게 사죄할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니냐. 죽어서도 반성해라." - P47
"내가 수아 님을 지켜 드릴게요. 사랑해요. 사랑해, 수아야…." THE마리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장작이 타들어 가는불규칙한 소리와 일정한 박자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삼켜졌다. 갑자기 마른하늘이 하얗게 번쩍거리더니 이내 벼락이 마리를 향해 내려왔다. 한 번내리꽂힐 때마다 마리를 감싸고 있던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 활활 타올랐다.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문제는 벼락만이 아니었다. 저렇게 내리치는 벼락을 불 속에서 맞으면 분명죽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는 거지? 어느새 장대에서 풀려난 마리가 팔을 휘두르자작은 불꽃이 작살을 휘두르던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남자의 머리카락에 옮겨붙은 불꽃은 불티를 날리며 살아 있는 뱀처럼 남자의 몸을 휘감더니 한순간에 크게 타올라 남자를 집어삼켰다. "요, 요괴다! 무녀가 요괴가 되었다!" 화려하게 흩날리는 불꽃이 마리의 몸을 옷처럼감싸고 있었다. 살아 있는 듯 휘몰아치는 불꽃은 시시각각 기묘한 문양을 만들었다. 날카로운 매의 눈같기도 했고,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생선 눈알 같기도했다. 소용돌이치는 태풍과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파도를 연상케 하는 무늬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P51
마리는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에 귀기 어린 표정을 띄우며 타오르는 장작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모든 한을 담은 듯 무거우면서도 거리낄 것이없다는 듯 가벼운 몸짓이었다. 마리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서 불꽃이 파도치듯 너울거렸다. 손을 들어 나뭇하게 휘젓자 살아 있는 불꽃이 사람들에게옮겨붙었다. 마리의 발걸음은 바람처럼 가볍고 벼락처럼 매서웠다. 불꽃을 온몸에 두르고 파도의 박자를 따라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짝 잃은 새가 넋놓고 우는 듯 애달팠고, 망망대해 위에서 죽어 지상을 떠돌게 된 영혼을 위로하는 것처럼 상냥했다. 사람들은 불이 자신의 몸을 잡아먹는 것도 모른채 넋을 놓고 마리를 바라보았다. 불은 신당에 있던사람들을 잡아먹으며 점점 커졌다. 바닷가에 있던사람들은 태양이 내려앉은 듯한 불이 코앞에 다가오는 걸 보고 혼비백산하여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빙 돌아 헤엄쳐 마을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기다란해초에 온몸이 칭칭 감긴 것처럼 물속으로 가라앉아 숨만 보글보글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타오르고, 아래로 가라앉고 있을 때 마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정말로 무녀를 태워서 얻은 재에 힘이 있다면…… "무녀인 저와 제물들을 함께 보내니 수아를 무사히 살려 주세요. 그것이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눈물조차 흐르지 못한 채 끓어올랐고, 너울거리는 열기 속에 모든 것이 타오르더니 이내 재만 남고 말았다.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옥가락지만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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