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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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정도 읽었을 때야 표지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책에 따르면 나의 익숙한 시각적 경험에 근거해 뇌가 잘못 판단한 결과다. 이 책은 철학, 진화론, 심리학, 신경과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조목조목 인간이 가진 합리성에 대한 환상을 부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혹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다양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꽤 괜찮은 합리적인 인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비합리적 선택을 한다. 당장 일찍 잠들어야 내일 할 일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기어코 늦게 자는 나부터도 그렇다.



책은 사례로 시작해서 처음부터 망상과 인식적 비합리성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다음으로는 이러한 비합리성 혹은 망상이 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지 다양한 학문에 근거하여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모든 확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동일하다는 사실 또한 지적한다. 많은 이론과 실험에 근거하여 저자는 '모든 확신은 가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대화를 해나가야 하는 이유로 연결지어서 좋았다.

비합리적 확신을 갖는 경향은 시스템상의 결함도, 맹장처럼 쓸모없는 것도, 부수 현상도 아니다. 이것은 뇌의 아주 ‘정상적인’ 기능 방식의 결과다. “버그가 아니라 특성이다.”

p.296.


내가 알고 또 믿고 있던 세계가 일순간에 뒤바뀐다면 패닉에 빠진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통제 상실감을 겪고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세계를 예측 가능한 곳, 통제 가능한 곳으로 바꾸기 원한다. 인식적 비합리성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 비합리성이 주는 효용(삶에 대한 통제감, 좋은 느낌)이 크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내고 여러 모순적인 일들을 잇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세계를 만든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진화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인식적 비합리성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에 대한 지식이 진실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해서 크게 놀라는 편이 실제 뱀이었을 경우 당할 피해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내용이다. 이렇게 우리 모든 사람은 뇌의 정상적인 기능에 따라 비합리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물론 이 중에서도 극단적인 편에 속해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망상증은 구분해야 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코로나 19 상황과 그로 인해 빠르게 심화되는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마주하며 '모두에게 어느정도 비합리적인 확신이 있으니 그냥 그렇게 살자'라는 말은 더이상 통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균열의 골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건설적인 대화를 해야 하며 서로를 끊임없이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대화를 위해 이 책이 도움이 된다. 확신은 원칙적으로 가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다른 사람의 확신에 대해 (아무리 터무니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도식, 이미지 같이 시각 자료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 이해를 도왔다. 특히 위쪽 이미지는 뇌의 예측 위계질서를 도식화 한 것인데 이 부분이 아주 흥미로웠다. 감각 데이터가 쏟아지고 그 데이터가 기존의 경험과는 차이가 있어 낮은 위계의 지각적 예측으로 처리할 수 없을 때 보다 높은 위계에 속한 인지적 예측(확신)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이라고 한다. 뇌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밖에도 다양하지만, 적어도 망상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 이론이 매우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덕분에 조현병 환자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조현병 환자들은 갑자기 주변의 자극이 낯설게 느껴져 정상인에 비해 지각적 예측 능력이 낮다. 따라서 인지적 예측에 더욱 의존하게 되어 확신이 더욱 강하게 발현되고 망상에 갇히는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여러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는 만큼 '책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딱딱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은 당장 버려도 좋다. 조금은 지루하게 느낄 수 있을 법한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렇게 재치있게 풀어낸다. 책 곳곳에서 저자의 유쾌함을 발견할 수 있어 즐거웠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원하는 'T'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어떻게 확신을 고집하는 사람과 좋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을 다루는 책은 아니기에 건설적인 대화 방법에 대해 알고 싶다면 『타인을 읽는 말』, 『인간관계론』 등이 더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확신'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해주는 책으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득력 높은 가설로서의 확신(p.316.)이 담긴 책이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우리는 확신을 바꾸는 것을 유약함의 표시라고 느낀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뒤흔들고, 새로운 증거로 인해 확신이 계속하여 ‘흔들리게끔’ 하는 것은 사실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p.327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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