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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멀쩡한 이유정 푸른숲 작은 나무 13
유은실 지음, 변영미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어릴 적 그러니까 초등 5학년 때였다. 우연히 방과후에 친구집에 놀러갔다. 집에 갈 시간이 되어 나는 친구에게 "지금 몇 시야?"라고 물었다.

  "4시 5분 전!"

 "뭐? 그게 몇 신데?"

  "야, 3시 55분을 말하는 거지, 넌 그것도 모르냐?"

  세상에 4시 5분이면 5분이지, 5분 전이 왜 55분이 될까?  그 친구는 반에서 그렇게 공부를 잘한 아이도 아니었고, 나도 그렇게 공부를 못한 편도 아니었기에 그날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난 누가 몇 시냐고 물으면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전'이 '앞전'자인 줄 몰랐기에 그 괴상한 시간 계산법은 무섭고 떨렸던 기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4시 5분 전이 자연히 4시가 되기 5분 전이란 사실을 안다.

  작가는' 이유정'이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늦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보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유정은 조금 늦될 뿐 멀쩡한 것이다. 어른인 나도 좌회전, 우회전이 가끔 어려울 때가 있다. 하물며 아이들은 아직 경험과 지식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아닌가. 그래서 우리 어른들은 이유정 같은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그냥 기다려주고, 다독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이라는 단편 동화는 정말 마음에 와닿았다. 한 번쯤은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이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날마다 아이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했으면 좋겠다.  

 많은 어른들이 가끔은, 그게 어렵다면 아주 가끔이라도 아이가 느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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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여고 동창과 전화 통화를 끝낸 후,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나는 책장 깊숙이 감춰진 20년 전의 여고시절 졸업앨범을 펼쳐 보았다. 나는 불안하다. 예전의 기억이 부분적으로 삭제되거나, 꿈과 섞여 새롭게 재탄생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며칠 전의 일이다. 뭔가 적으려고 볼펜을 찾는데, 필통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도서관 수업 후 책상에 놔두고 온 건 아닐까. 재깍 도서관에 전화를 했다.

  “수요일 수업 후 책상 위에 놔두고 온 것 같아요. 색깔은 진남색이고요,  '필    라'라고 분홍 글씨로 써 있어요. 하필 필기도구도 잔뜩 들어 있는 데 큰일이네요.”

  잠시 후 전화벨이 울린다. 두근두근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책상 위, 아래 모두 찾아 봤는데 없네요.”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울상이 됐다. 잠시 동안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간신히 추스르고 일어섰을 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잃어 버렸다고 신고한 필통이 식탁 위에 버젓이 있는 것이 아닌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더니, 꼭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어쨌든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찾았을 담당자에게 미안한 노릇이다. 기가 막히는 것은 필통이 왜 거기에 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건망증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가장 어이없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신혼 때였다. S백화점에 쇼핑을 하러 갔었다. 임신을 해서인지 손가락이 꽤 부어 있었지만, 다이아 반지를 기어코 끼우고 갔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백화점은 꽤 붐볐다. 9층 스푼과 포크를 파는 매장이었는데, 아줌마들이 어찌나 극성인지 밀고, 당기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임신 7개월 임산부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아하게 쇼핑하려던 나는 괜히 남편에게 투덜거리며 지하 식품 매장에서 장만 보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옷을 갈아입고 막 손을 씻으려는 찰나, 내 눈을 의심했다. 손가락에 있어야 할 다이아 반지는 선명한 빨간 자국만 남긴 채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혼잡한 백화점 9층 매장을 얼른 떠올렸다. 5인조 소매치기단이 내 다이아 반지를 노리고 혼잡한 틈을 타 반지를 빼갔다고 확신하고, S백화점 고객만족실로 부리나케 전화했다.

  “오늘 백화점 9층 매장에서 제 다이아 반지를 소매치기 당했어요. 몇 백만 원 하는 건데요. 어떡해요.”

  나는 거의 울다시피 전화를 끊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반지를 빼가는 데도 모를 수가 있어.” 하며 남편은 언성을 높이며 눈에 핏발을 세웠다.

  “글쎄 나도 몰라. 여기에 있어야 되는데 없잖아!”하며 울부짖었다.

차라리 반지를 끼우고 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화장대 서랍을 거칠게 열어도 봤지만 그곳에 있을 리 만무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다급한 목소리의 백화점 직원이었다.

  “각 층의 CCTV를 모든 보안 요원이 샅샅이 검색해 봤지만, 소매치기하는 모 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는 손이 심하게 떨려 눈앞이 어지러웠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물건을 잃어버린 일은 처음이라 두렵기까지 했다. 남편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당신 손가락은 무사하잖아. 예전에 들은 얘긴데, 등에 업힌 아이 손가락의 돌 반지를 빼내기 위해 손가락도 부러뜨리기도 했대.”라고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위로를 해주었다.

  비장한 각오로 장사를 지내듯이 다이아 반지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렸을 즈음, 다이아 반지는 입고 있던 나의 트레이닝 바지에서 거짓말처럼 발견되었다.

  이렇듯 나의 건망증은 불안과 환희를 넘나드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것이다.

 

 

  김수정. 여고 시절 그녀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걸을 때 절뚝거렸는데, 몸매가 가냘팠고, 키가 컸다. 그녀는 윤동주 시인과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로 고전문학 선생님을 유난히 좋아했고, 난 문제를 몰라도 절대 무안을 주지 않은 자상한 수학선생님을 좋아했다. 우린 만나면 교정의 장미꽃을 보면서도 할 말이 많은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다.

  큰 아이가 네 살 되던 해 추석을 쇠러 시댁을 갔다가 우연히 광주 공항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때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서울 올라가서 몇 번의 연락을 했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세상에 혼자 남아있다고 절망했을 때, 불현듯 그녀가 그리웠다. 어렵게 그녀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했는데, 조금은 어색할 줄 알았던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자식 이야기로 한참을 깔깔깔 웃으며 이야기 하다, 내가 먼저 여고시절 추억을 꺼냈다.

  “수정아, 고3때 수학시간에 네가 뒤에서 쪽지 보냈잖아, 내가 수학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꼿꼿이 앉아 있어서 내 뒤통수만 보인다고.” 나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생각하는 현정이가 누굴까?”

  “……”

  “아, 기억났다. 현정아, 너랑 대학 축제 때 맥주를 마셨는데, 네 얼굴이 빨개졌 다.”하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와 다른 대학에 다녔을 뿐만 아니라, 맥주를 마셨다고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은 더욱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의 대학에 초대받아 갔을 수도 있고, 맥주를 많이 마셔 얼굴이 빨개졌을 수도 있겠지만 전혀 생소한 기억이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늦둥이 딸이 보채는 바람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공황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 후로 그녀에게서 연락이 없다.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오면, 정수기 팔아 달라거나 보험 들어 달라는 경우가 흔히 있다고 한다. 나의 순수한 마음이 그녀에게 잘못 전달된 것만 같아 애석하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다이아 반지가 다시 돌아 왔던 것처럼 그녀와 나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아 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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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주한 지도 벌써 반년이나 지났건만 전 재산을 투자해서 얻은 보금자리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 흔히 상투 잡는다고 했던가. 가장 비쌀 때 산 아파트 가격은 갈수록 하향곡선으로 치닫더니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내부의 크고 작은 하자는 또 어찌나 많은 지 한동안 아파트 시공업체가 뻔질나게 제 집 드나들듯이 하지 않았던가. 하긴 그땐 나도 좀 진상을 떨었을 테지.

 그런 내가 아파트 홍보대사를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게 된 것은 7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아파트 1층 현관문을 들어서려는데 좌측 광고판에 “○○아파트 홍보대사 모집”이라는 공고를 발견했다.

  ‘어? 입주민을 대상으로 일 년에 두세 번의 홍보대사 미션을 수행하면 얼마간의 수당을 지급한다고!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한 번 해 볼까?’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터놓고 모닝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 떨 수 있는 이웃 한 명쯤 만들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별똥별 떨어지는 것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첫 미션이 떨어졌다. 아파트 입주민 세 명에게 당 아파트에서 실시하는 서비스 내용과 우리 아파트 인터넷 카페와 이벤트 행사를 홍보한 후 몇 가지 주제에 대해 공유하면서 수다 떨기란다. ‘후후, 어쩜, 내가 바라던 일이잖아! 결과 보고서 쓰는 거야 뭐, 내 전문이니 식은 죽 먹기고, 서명은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해 주겠지!’더욱이 교육이나, 여가에 대한 정보공유란 항목에 시선이 꽂히는 순간, 나는 이미 거실에 다과상을 차리고 이웃 엄마들과 호호, 하하 웃고 떠들고 있었다. 상상만 해도 내일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렜다.

 하지만 즐거운 상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청소기를 돌리고 신문을 뒤적뒤적 하는데 불현듯 누군가와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었다. 내친 김에 홍보대사 미션도 할 작정이었다. 옆 동에 사는 둘째아이 같은 반 아이 엄마가 떠올랐다. 그녀와는 평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지만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은 사이다.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한 번 더 해 봤다. 역시나 안 받았다. 초조했다. 발신 번호 횟수는 어느덧 여섯 번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러다 스토커가 될 것 같아 포기했다. 이렇게 간담회를 열겠다는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홍보지와 결과 보고서를 들고 나와 무작정 아파트를 돌기 시작했다. 여름의 더위가 가시기 시작한다는 처서가 지났건만 햇볕이 이글이글 거려서 뒷목이 따가웠다. 한참이나 아파트를 빙빙 돌아보았지만 벤치나 정자 그 어디에도 앉아서 쉬고 있는 사람은 안 보였다. 그때 저만치 사십대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뒤쫓아 갔다. 또각또각 내 신발소리에 뒤돌아서 힐끔 보는데 막상 뭐부터 말해야 할 지 몰라 슬쩍 옆길로 피해버렸다.

  서명 얻기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한 나는 일단 슈퍼로 뛰어가 캔 커피 4개와 쿠키 한 상자를 사들고 내가 사는 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2층. 현관 앞에 우유 주머니가 매달려있다. 분명 아이 키우는 집일 테지. 초인종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었다.

3층. 초인종을 누르니 뜻밖에 큰 딸 친구가 나왔다. 나는 상냥하게 말을 건냈다.

“엄마 계시니?”

“아뇨. 직장 가셔서 저녁 늦게 오세요.”

“언제 오시는데?”

“회식 있어서 아주 늦게 오신댔어요.”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것처럼 아쉬웠다. 들고 있던 과자나 몇 개 쥐어 주자 문이 닫힌다.

  5층.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하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저 14층에 사는데요. 저… 홍보대사, 저… 문 좀 여 열어주세요.”

 나도 몰래 말을 더듬더듬 거렸다. 뒤돌아서 그냥 가려는데 문이 스르륵 열린다. 얼른 캔 커피를 건네며 이야기했다. 서명을 부탁하니 흔쾌히 해 주었다. 몇 차례 실패한 끝에 두 집의 서명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결과 보고서를 쓰려니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어째 허전하고 씁쓸했다.

 하지만 아파트 홍보대사 아르바이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시다 만 캔 커피의 맛이 달콤해 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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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석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날 밤, 규홍의 방안 풍경은 잘려 나간 달수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에 창애의 비명소리까지 더해져 괴기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규홍은 입술이 새파랗게 된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창애를 뒤로하고 축 처진 달수를 들쳐 업고 방을 뛰쳐나간다.

 

  창애는 차갑고 축축한 것이 스르륵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라 상체를 뒤틀면서 일어나 앉아본다. 분명 부엌에서 밥을 푼 것 같았는데 지금 방에 있는 자신이 혼란스러워 멍하니 벽을 응시해 본다. 멀쩡한 사람이 누가 지랄쟁이를 데리고 살아. 나 같으면 절대 결혼 안할 테야. 절·대 결혼 안할 테야…귓전을 파고드는 누군가의 외침이 창애는 뼈에 사무치도록 서럽다.

  불러오는 배를 문지르며 창애는 가끔 당돌하게도 뱃속의 아이가 청년 삼인이 태권브이처럼 합체라도 하면 어떨까 제멋대로 상상해 본다. 진한 눈썹에 쌍꺼풀이 진 이글이글한 눈과 깍은 듯이 오뚝한 콧날의 소유자 준석의 외모에다 툭하면 울기나 하는 못난이 같지만 그녀의 작은 허물도 감싸줄 것 같은 달수의 부드러운 심성, 규홍의 탄탄한 재력과 세상을 시로 풀어내려는 정열을 머릿속에 그려 보며 창애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사건이 있던 날 이후 행려병자가 된 준석은 규홍의 임시 거처를 몰래 찾아 가 본다. 준석은 달수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창애 뱃속의 아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준석은 대문 앞을 서성이며 한 쪽 팔은 목발에 의지한 채 한 손으로 연신 얼굴을 훔쳐 내며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창애가 준석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그즈음 창애가 발작하는 일은 잦았는데, 대책이 없이 방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횟수가 늘면서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게 변해 갔다. 꼭 창애의 몸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 있는 것만 같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철렁하게 하곤 했다. 창애의 총기 있던 까만 눈동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초점을 잃어 갔으며, 벽에 방처럼 붙은 규홍이 쓴 “혈서”라는 시를 보며 웃고 재잘거리던 그녀의 입술은 음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었다. 주구장창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던 준석도 창애가 발작하는 순간만큼은 일어나 앉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창애의 몸과 접촉하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준석은 우발적으로 창애를 덮치게 되었다. 연민은 사랑의 감정을 가져다 줬지만 준석이 처한 상황은 그를 더욱 비참한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것이다. 번번이 규홍을 창애의 배필로 못 박아 버리는 박 노인의 편지를 볼 때 마다 준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렇게 달수에게 격하게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이제 혈서라도 쓰듯이 순간을 살아보고 싶었던 준석의 욕망은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고, 대신 창애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만이 준석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대문을 휘몰아친다. 집 안쪽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준석은 본능적으로 절뚝거리며 뒷문으로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다.

 

  하늘은 실연당한 여인의 눈빛처럼 흐리고, 황량한 들판 가운데 길게 난 언덕 위에는 상여가 지나간다. 먼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걷는 박 노인의 뒤를 달수가 “창애야, 창애야”를 부르짖으며 뒤 따라간다. 달수의 품에 안긴 핏덩이가 박 노인과 달수의 애끓는 슬픔을 대신해 처량하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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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 엄마
 

                                                      김  현  정

            수화기 너머로  

            언니가 내 안부를 묻는다

            "별일 없지?" 묻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다.

            "나, 아퍼"

            이윽고 어린애처럼 엉엉 운다.

           

            어렸을 적

            엄마  대신해 

            꽁꽁 언 손 녹여가며 밥하던

            초등학생 엄마가 운다.

             

           빡빡 쌀 씻는게 재밌어 보여 

           나도 한 번 해 보자고 떼쓰던

           철부지 동생은  울먹이며  

           그저 언니의 울음을  

          주머니에 담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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