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리들 - 우리의 시간에 동행하는 별빛이 있다 들시리즈 3
이주원 지음 / 꿈꾸는인생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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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빛, 행성, 사람들』의 추천사에 대해 적어두고 싶다. 그 책은 물론 책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이주원 작가의 추천사가 있어 조금 더 반짝였다(고 나는 느꼈다). 그러니 내가 반했던 글을 여기 적어두고.

"때론 수백 광년 떨어진 별보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이를 이해하는 것이 휠씬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타인뿐인가. 내 마음의 소리는 세상 속 잡음에 섞여 희미해진지 오래다. 나를 비롯하여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광활한 우주속에서 작은 신호를 찾아 헤매는 천문학자의 일과 닮아 있다. 긴 시간이 걸리고 약간의 우연도 필요하며 희미한 신호도 놓치지 않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한편 평온했던 일상에 균열이 생겨 불안과 분노, 슬픔이 스며들지도 모르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로 이별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노력했다 한들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고, 타인에게는 시간 낭비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실패가 두려워 눈과 귀를 닫고 마음을 외면한 적은 없었는지를 말이다. 그러곤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대도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위로를 건넨다. 실패해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실패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노력을 멈추지 말자, 우린 우주를 알고 싶어 하는 만큼이나 서로를 알고싶어 하는 존재들이니까."

2. 책날개의 작가소개 읽는 걸 좋아하는데 이유는 첫째, 저자에 대한 의외의 정보를 알려준다. 둘째, 저자의 다른 책들(특히 제목, 생각보다 제목만으로도 굉장히 즐거운 책들이 많다)은 뭐가 있나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끔 소소하게 즐거운 문장을 만나기 때문인데 이 책에는 세번째 즐거움("나의 실패를 즐겁게 말하는 것도 좋아한다")이 있었다.("언젠가 사무엘 베케트는 이렇게 썼다. "시도했고,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하기. 다시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3. 헬렌 고든, 『깊은 시간으로부터』에 나오는 구절.

"나는 지질학자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 다르다는 점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절반은 우리가 인간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 속에서, 절반은 더 거대하고 더 이상한 규모의 시간, 즉 깊은 시간deep time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시간이 초, 분, 시, 년으로 측정된다면, 깊은 시간은 수만 년, 수백만 년, 수억 년의 시간을 다룬다. 그런 아득한 시간을 생각하면 살짝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 든다. 깊은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조금 다른 곳을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깊은 시간 속에서는 지난주, 작년, 지난 10년 동안 일어난 일만이 아니라 100만년 전, 5,000만년 전, 5억 년 전에 일어난 일도 중요하다. 우리가 바로 지금 이 특별한 순간, 이 특별한 장소에 있는 이유는 그런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사건들의 연속으로 설명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천문학자들(혹은 별을 바라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를거라 생각한다. 아득하고 깊은 시간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의 글을 좋아하고.("시간이 흘러도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을 것이고 우리는 항상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을 것이다.")

4. 어릴 적 별이 쏟아지는 제주 밤하늘 이야기(아마도 밤하늘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다들 이런 순간이 적어도 한 번쯤은 있었을 법한데 어린 칼 세이건에게도 있었다.
"겨울에 일찍 잠자리에 들면 창밖으로 별을 볼 수 있었는데, 별들은 우리 동네의 다른 무엇과도 달라 보였습니다."(『칼 세이건의 말』)
별이 궁금해진 어린 칼 세이건은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어 도서관에 가 별에 관한 책을 읽는다. "그때 도서관에서 그 책을 읽던 순간, 우주의 방대한 규모가 제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거기에는 뭔가 아름다운 것이 있었습니다.")부터 천문학과 함께 보낸 십대 이십대 시절 이야기까지, 천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오히려 별을 거의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저자이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캄캄한 학교 운동장에 누워 별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더불어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의 단정한 문장들은 언제나 읽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자세히 보고 물어보고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느끼는 것 어떻게 보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스탠드를 켜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뒤, 반으로 접은 A4 용지에 문제의 풀이 과정을 세세하게 적고 나면 자정을 휠씬 넘은 시간이 되곤 했는데, 그 고요함 속에서 뿌듯함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5. 세페이드 변광성에 얽힌 얘기, 빅뱅이론의 증거를 발견하는 에피소드도 즐거웠다. 빌 브라이슨의 책에도 언급되는 잡음.

"한편 우리도 우주 배경 복사 때문에 생기는 잡음을 언제나 경험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이 없는 채널에서 보이는 무질서하게 물결치는 무늬 중에서 약 1퍼센트 정도는 오래 전에 일어났던 대폭발의 잔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다음에 그런 화면을 보면 우주의 탄생 모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6. 덕분에 델리 스파이스의 <항상 엔진을 켜둘게>를 들으며 신이 났고("아직은 어두운 하늘 천평궁은 빛났고 차 안으로 스며드는 찬공기들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게")

용수철龍鬚鐵의 한자에 용과 수염이 들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7. 그리고 가장 좋았던 구절

"성단 속의 별들은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성단 안을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있어. 자기만의 궤도를 그리면서 말이야.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 그런데 주변에 별이 워낙 많으니 한 번쯤은 다른 별과 맞닥뜨리게 돼. 이걸 '조우'Encounter라고 불러.
별과 별이 맞닥뜨릴 때, 흔들리는 정도로 작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만, 가야 할 길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경우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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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들 - 우리의 시간에 동행하는 별빛이 있다 들시리즈 3
이주원 지음 / 꿈꾸는인생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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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빛, 행성, 사람들』의 추천사를 쓰셨던데 추천사가 너무 좋아서 혹시 다른 글도 있나 검색해보고는 찾아 읽게 되었어요. 오래 전 언젠가 천문학자는 필연적으로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글을 읽었는데 정말 그래요. 별과 우주 같은 깊은 시간을 들여다보는 이들의 시선은 언제나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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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시인선 194
황인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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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이 글자수를 초과했다고 하여 이어지는 글은 여기에 남겨둠)
그러나 손에 쥘 수 없다고 해서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는 즐거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시집을 펼치고 시의 영혼이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다.("그녀는 그녀 안에서 사방을 헤치고 다니며 도망치려고 애쓰는 어떤 생명체의 움직임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영혼이라고 불렀다." 버지니아 울프)

(여기서부터가 마이 리뷰)

ㅡ시인의 말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당신이 먹었습니다)

괄호 안의 이 말은 (영화 <패터슨>에도 등장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와 연결된다.

다름 아니라(This is to say)

내가 먹어버렸어
그 자두
아이스박스
속에 있던 것
아마 당신이 아침에 먹으려고
남겨 둔
것이었을 텐데
미안해
하지만 맛있었어
얼마나 달고
시원하던지

그리고 시집에 수록된 시 「흰 배처럼 텅 비어」와도 연결된다. (그리고 이 시의 제목은 최승자의 시「빈 배처럼 텅 비어」와 연결되지)

"과육이 희고 물이 많은 배였습니다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어요 누가 깎아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먹었습니다 무슨 외국 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메모를 따로 남겨두지는 않았습니다"

시에서는 자두가 아니라 배가 놓여 있고 시의 화자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누군가 먹으려고 깎아둔 배를 날름 먹어버린다.(그런데 빈 접시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걸 보고 처음 보는 유령이 배는 누가 먹었지 물어봤다면 유령은 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되겠지. 배는 유령이 먹으려고 깎아둔 걸까? 확신은 금물이지만 아무튼) 시에서는 배를 먹으려던 누군가가 배를 먹지 못하였지만 시인의 말에서는 아니다.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그리하여 당신이 먹었다. 그런데 이 문장에 괄호가 있다는 건, 멋대로 추측해본다면 시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현실이 괄호 안에 머무르게 되는 걸까? 그러니까 현실의 자두는 누군가 훔쳐먹지 않았고 시의 배는 누군가 훔쳐먹었다는 것. 게다가 시에서 배를 몰래 훔쳐먹은 자는 거짓말까지 하잖아.(나빴다)

"처음 보는 유령이 찾아와 누가 배를 먹었느냐 물었습니다 저는 아주 먼 곳을 가리켰고 유령은 그곳으로 떠나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의심스러운 것은 처음 보는 유령이다. 유령이 떠나고 난 뒤엔 "뒤집어쓰고 있던 흰 테이블보만 남아" 있었다. 유령이 테이블보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이유는 무얼까. 아무도 없는데 배가 없어져서 무서웠을까? 그렇다면 혹시 처음 보는 유령은 유령이 아니라 흰 테이블보를 뒤집어써서 유령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처음 보는 유령이 말을 건, 그러니까 배를 훔쳐먹은 화자의 정체는 뭐란 말이지? 혹시 화자가 유령이었던 건 아닐까? 여기서 유령이라는 말이 조금 무섭다면(흰 테이블보를 뒤집어 쓸 정도는 아니지만) 유령을 유령이 아니라 조금 비슷한 느낌의 영혼이라는 단어로 바꿔볼까. 시의 세계에서 영혼은 사람이 먹으려던 배를 훔쳐먹는다.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겠지. 물론 시인의 말에서처럼 현실의 세계에서 사람이 먹으려던 자두를 훔쳐먹는 영혼은 없다. 그러니 당신이 먹으려던 자두는 당신이 먹었겠지. 그러니까 이 시집의 세계에는 영혼이 등장하고 그 영혼은 장난기가 있을 것이며 마음이 좀 아프게도 영혼의 나머지 반쪽인 몸을 가진 사람과 계속해서 어긋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흰 배처럼 텅 비어」에서 화자(영혼으로 추측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먼 곳으로 인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령(몸을 가진 사람으로 추측됨)과 헤어지게 되는 것처럼. 이런 어긋남은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해 구하기」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에서의 어긋남)

사실 분명한 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겠다는 것이지. 나에게 이 시집은 몸과 마음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아마도 마음이 영혼쪽이라 생각해본다면 몸과 마음의 이야기 혹은 몸과 영혼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많이 한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다. 마음 둘 곳이 없다.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상황에 대한 묘사다. 마음은 몸이라는 집이 필요할 터인데 집은 마음이라는 거주자가 없다면 쓸쓸하게 텅 빌 터인데. 그러나 우리는 안다. 마음과 몸이 (믿음으로) 하나 되어 말 그대로 일치함으로 존재하는 순간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는 것을. 몸과 마음이 현재라는 순간의 한가운데에 온전히 머무르는 일. 그런 순간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생각도 없고 설정도 없다. 시집에는 드물게 반짝이는 그런 순간들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어긋남의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영혼이 있다. 새의 모습으로 개의 모습으로 입김의 모습으로 그림자의 모습으로 흐리고 흰 빛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시집을 펼쳐본다.

ㅡ시인의 말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시작되는 시집은 (시집의 첫 시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역시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자"로 시작된다) 마지막 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마지막 구절 "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로 끝난다. 아니 어쩌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빛의 용사 전설」) 왜냐하면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할 거니까. 시에서는 사실 이 말을 하는 사람과 들은(제목이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이니까) 사람이 과연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났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 말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였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시를 읽는 사람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시를 읽는 사람에 의해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될 수 있다.)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에서의 대화를 나와 내가 나누는 대화라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나와 내 영혼이 나누는 대화. 그렇다면 아직 영혼과의 단절은 일어나지 않았고. 하지만 시에서는 알 수가 없다. 과연 내일의 만남이 있는지 내일의 대화가 있는지. 영혼과의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끝나는 것처럼 보이니까(왜일까). 시에 언급되는 "나머지 이야기"는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문도 모른 채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으려면 아주 긴 시간이 흐르고 흘러야 할지도.(최승자의 시 「빈 배처럼 텅 비어」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그런데

"학교에서 봐"라며 앞의 시가 끝나고 그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시의 제목이 「학교를 안 갔어」라는 건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좀...일부러 그런거지? 라고 말하고 싶어지잖아. 가끔 이런 장면을 만나면 페이지에 적힌 문장의 뒤에서 시인이 희미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다.(이 시에는 이런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 "시를 벗어났어"라는 구절. 이것은 표면적으로 화자의 학교가 있는 지역을 벗어났다는 말로 읽히지만 또 다른 엉뚱한 해석에서는 말 그대로 시詩를 벗어났다는 말로도 읽힌다. 그치 시에서는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지. 말도 안 되는 말일지라도, 읽기만 해도 즐거운 구절이니까. 우리는 학교도 벗어날 수 있고 시를 벗어날 수도 있지 얼마든지 그렇지. 웃고 있는 시인의 얼굴이 또ㅡ)이 시에서 학교를 안 간건 나인가 아니면 영혼인가? 이게 의심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당연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전철을 타고 있는 아이에게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 왜? 사람들이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 아니면 화자가 실은 영혼이라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그렇지만 시집에서 개는 영혼을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가 여길 보고 짖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바지를 입은 사람은 바지를 입고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나도 사람에게 할 말은 없었어" 사람에게 할 말이 없다는 건 화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일까? 사람에게 할 말이 없는데 앞의 시에서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함"이라고 했다는 건 사람이 아니라 영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라는 걸까? 그런데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는 대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학교를 안 갔어」라는 시에서도 전철에 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 기관사의 안내방송에 대답을 안 한다. (당연하지, 세상에 어느 누가 기관사의 안내방송에 대답을 해)라고 말하고 싶겠지. 그러나 기관사의 말에 너무도 당연하게 마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도 대체로 영혼이 하는 안내방송에도 귀기울이지 않을 게 뻔하다(라고 말하면 너무 편견일까요).

ㅡ밝은 방

시의 제목에서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밝은 방,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는 프리즘, 거울, 현미경을 이용하여 물체의 상을 종이나 화판 위에 비추어주는 장치이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오는 즐거운 어원 공부 시간)

lucida
(n.) 천문학에서, '맨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별', 또는 '별자리나 그룹에서 가장 밝은 별'을 뜻합니다. 1727년에 사용된 이 용어는, '밝은 별'을 의미하는 라틴어 형용사 lucida(stella)에서 유래하며, '빛, 밝음, 명료하다'는 뜻의 라틴어 lucidus에서 왔습니다. 천문학에서는 1690년대부터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lucid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바르트의 책에서 밝은 방이 언급되는 부분을 조금 살펴 본다.

"사진의 기술적인 기원 때문에 그것을 어두운 통로(암실/어두운 방; 카메라 옵스큐라)의 관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밝은 방(카메라 루시다)을 언급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선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의 본질은 내밀함 없이 전적으로 바깥에 있으나 내면의 사유보다 더 접근할 수 없고("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라는 폴 발레리의 말이 생각난다) 더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시적인 의미는 없지만 가능한 모든 의미의 깊이를 부른다. 그것은 세이렌(반인반어의 요정)의 매력과 매혹을 만들어주는 그 존재ㅡ부재를 지니고 있음으로써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뚜렷하다.(블랑쇼)"

바르트는 말한다. "우리가 사진을 깊이 파고들 수 없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지닌 명백함의 힘 때문"이라고. 그리고 말한다. "내가 이 사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의 확실성에 비례한다."고.

아아 바르트는 여기까지만. 시집에는 사진이 언급되는 시가 여럿 있다.(「밝은 방」, 「이미지 사진」, 「받아쓰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고요의 풍속은 영」, 「미술관에 갔어」) 그리고 놀랍게도 빛이라는 단어가 마흔 번이나 나온다.(궁금할까봐 적어두자면 어둠은 스물두 번 나온다)

「밝은 방」에서 화자는 (아마도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사 앞에 서 있다. 그런 화자의 눈에는 자꾸 유령(나의 식으로 말하자면 영혼)이 보인다. 할머니의 유령도 보이고 둥둥 떠다니는 개의 유령도 보이고 조금 전 놀이터에 묻고 온 새의 유령도 보인다. 눈을 뜨면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 나는 눈을 조금만 뜨기도 하고("사진사는 말한다 눈을 크게 뜨라고 하지만 나는 대답한다 이게 다 뜬 거예요") 혹시 눈을 감으면 유령들이 사라질까 눈을 질끈 감아보기도 한다("(눈을 감은 분이 있어서 다시 찍을게요)"). 그러나 유령(그러니까 이 시 안을 날아다니는 영혼들)은 사라질 생각이 없고. (물론이다 사진속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시 속에서는 영혼들이 날아다니기도 한다) 사진사는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터지는 소리가 나고/빛이 보이고"「받아쓰기」) 그렇지만 사진사가 찍은 사진에 과연 영혼들이 찍혔을까?

울새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에밀리 디킨슨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은 듯하다. 디킨슨의 사진은 딱 한 장 남아 있다.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크리스티앙 보뱅의 에세이 『흰 옷을 입은 여인』에는 디킨슨이 단 한 번 사진을 찍었던 그 장면이 (물론 크리스티앙 보뱅의 상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진사들은 죽음이 부리는 하인들이다. 한 사진사가 같은 날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두 젊은 여자의 인물사진을 찍는다. 에밀리 디킨슨과 마거릿 오렐리아 듀잉. 마거릿은 스무 살이고, 에밀리는 열일곱이다. 마거릿은 미소를 짓고, 에밀리는 미소 짓지 않는다. 미소를 짓는 순간 마거릿은 자신의 신비를 잃는다. 사진사의 기계적 의지에 대한 복종에 불과한 그녀의 미소는 우리에게 닿기도 전에 무로 녹아든다. 세상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에밀리는 하느님을 보존하여 사라지지 않게 한다. (....)
사진사는 각자에게 몇 분 동안, 즉 은판에 상像이 고정되는 동안 움직이지 않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영혼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린아이다. 에밀리의 영혼을 훔쳐보고 싶다면, 수풀 속 한 마리 참새처럼 날갯짓하는 그녀의 편지를 읽어 보는 게 좋겠다."(크리스티앙 보뱅, 『흰 옷을 입은 여인』)

사진사가 화자에게 미소를 지으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 시가 이 시집에도 있다. "턱을 당기세요 이쪽을 보세요 미소, 아주 조금만요"(「받아쓰기」) 과연 화자의 미소는 사진에 담겼을까. 그러니까 이런 미소 말이다. "새들이 햇살 아래 자주 웃고 떠든다는 생각"(「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사진은 과연 찍히는 대상의 모습에 대한 '받아쓰기'가 맞는 걸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사진속에서 대상을 그대로 받아쓴 모습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조금 엉뚱하지만 '바다를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는 편이 더 즐거울지 모른다. 그것이 영혼에게는 더 즐거운 일일지도. 에밀리 디킨슨의 영혼을 살펴보기 위해 디킨슨의 사진이 아니라 "수풀 속 한 마리 참새처럼 날갯짓하는 그녀의 편지를" 읽어보라고 한 크리스티앙 보뱅의 조언처럼.

롤랑 바르트에 대한 애정이 담긴 나탈리 레제의 『전시』에는 사랑스러운 구절이 많지만 그 중 일부만 가져와 본다.

"가장 닮은 초상. 아마도 그것은 어떤 작가가 포즈 촬영 중에 흰 종이에 옮겨 적은 이 서툰 필적, 일정치 않은 형태로 비틀거려 판독하기 힘든 열 줄 남짓한 문장이리라. 페이지 아래쪽엔 다음의 설명이 달렸다. "사진가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을 서재에서 찍으려 합니다. 뭐든 막 적으세요.: 1979년 5월 9일." 살짝 후회하는 듯한 태도, 활기 없는 시선과 옹색한 웃음, 우리가 자주 사진에서 확인하는 그 모습으로 롤랑 바르트는, 그러니까 문제된 사람은 바로 그다, 저자의 포즈를 취했다.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손에 만년필을 쥐고 상대방의 시선 아래서 뭔가 쓰는 척, 아무거나 일련의 글자들을, 몇 줄의 글을, 위장된 글쓰기를 끼적거리기. 그야말로 억지로 자기 자신의 캐리커처를 따르게 된 작가의 초상이 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사진 그 자체의 초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촬영된 사진들을 보관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그 갈겨쓴 글씨는 간직했다. 이 비밀스럽고도 강요된 자기 투사는 잊힌 문서들 속 흰 종이면 위에 남고, 한 장의 사진을 두듯 별도로 보관된다. 사진가들이 늘 자신의 분위기를 놓쳤"으며, 따라서 남는 건 오로지 그 자신의 정체성일 뿐 그의 가치는 아닐 것이라 말한 그이니만큼, 스스로 자기 자신이라 여긴 바의 얼마간을 보호하는 임무를 그 수수께끼 같은 몇 줄에 맡긴 것이리라."

ㅡ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번에는 또 다른 사진으로 (날아)가 본다. 사진 속(혹은 사진 밖) 아름다움을 조금 들여다보기 위해. 오래 전 사랑하는 사람과 소쇄원에 갔었다. 시작은 뻔했지. 남들도 다 거쳐간다는 관광 코스, 담양? 담양이면 여기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를 꼭 가봐야지 아무렴. 이곳을 거쳐간 다른 사람들은 다 가봤다는 장소,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 풍경을 보지 못하면 나만 손해보는 것 같아 들르게 된 장소. 사실 기억은 많이 흐릿하고 대체로 부옇다. 자그마한 조각 같은 장면들이 깜빡일 뿐이다.("밤이 어두웠고 반딧불의 흐린 빛은 물 위를 떠돌다 곧 사라졌다"「인화」) 이상하게도 그날 우리가 갔던 그 시각 소쇄원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그 유명하다는) 소쇄원이래. 크지 않은 공간을 조금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마루에 앉았다. 마루에 나란히 앉아 비내리는 소쇄원을 바라보았다. 소쇄원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그리 길지도 않고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순간이었다. 사진은 없다. 이상하게도 담양의 다른 관광지들을 찍은 사진은 많은데 그날 소쇄원에서 찍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비가 와 그런 것일 테지만 그 이유에 대한 기억도 이제는 흐릿하다. 그러니까 소쇄원의 아름다움에 대한 내 장면은 이렇듯 흐리고 불분명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쇄원을 생각하면 여전히 귓가에서 그날의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름 티셔츠를 입은 팔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날 소쇄원의 어둠. 결코 해명되지 않을 아름다움. 어쩌면 아름다움을 찍겠다고 아름다움에 환하게 빛을 들이대는 순간(움직이시면 안 돼요, 찰칵ㅡ) 아름다움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것인지도 모르지. 아름다움은 존재하지만 그 궤적을 남기고 싶어하지는 않는 것인지도.("새가 지나갔으나 보이지 않는 궤적이 있다."(「내가 아는 모든 것」)

그리고 이 시(「아는 사람은 다 아는」)가 있다.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내가 있고 물론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 소쇄원의 아름다움은 소쇄원에 앉아 소쇄원에 대해 검색을 하며 들여다본 핸드폰 화면 속("소쇄원은 한국의 민간 정원 가운데 최고로 꼽히고 있다")에도 있고 오래된 건물 주변과 그 건물 주위를 흐르는 물, 그리고 곳곳의 나무들과 풍경들(한 번 슥 둘러보는 시선ㅡ) 속에 있다. 아름다움은 그 건물과 풍경들을 배경으로 찍은 우리의 사진 속에 있고 그 사진들을 찍으며 "남는 건 사진뿐이야"라고 말하는 그 말 속에 있다.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 소쇄원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며 아름다운 날이었지,라고 회상하는 마음속에 있고 심지어 훗날 누군가와 소쇄원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로 그 (미래의) 순간에도 만들어지는 중이다.("말하게 되는 그 순간에/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아름다움은 ("너무 작아서 오래 걸을 것도/오래 볼 것도 없는") 소쇄원을 돌아다니며(에계, 이게 다야?) "소쇄원이 보이지 않는" 사진을 찍은 그 순간들 속에........."아름다움 어렵네"

사실 잘 모르겠다. 아름다움 뭘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의 순간 안에 내가 오롯이 존재하는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의 순간에 나는(나의 마음은, 나의 영혼은) 바깥을 헤매고 다니느라 마음의 안쪽이 아닌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름다움이란 이런 거라고 세상이 말해주는 이야기들에 귀기울이느라, 아름다움의 순간이 반짝ㅡ하고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두려워 서둘러 기록(찰칵 찰칵)을 남기느라 마음이 바빠 마음이 딴 데 가 있어 아름다움은 홀로 우두커니 외롭게 남아 있는 것인지도. 그리하여 바깥은 언제나 아름다움으로 북적이는데(밝은 빛, 시끄러운 소리,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안쪽은 대체로 텅 비어 있다. 내용물이 사라진 텅 빈 그릇으로 남아.("빈 접시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흰 배처럼 텅 비어」)

이 시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 「인화」

인화의 사전적 의미
사진 원판을 인화지 위에 올려놓고 사진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

사실 제목과는 달리 이 시에는 딱히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사진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각인된(인화된) 장면. 그건 진짜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것의 특성이 짙게 스며들어 분명하지 않고 흐릿하다. 기억이라는 인화지 위에는 늘 캄캄한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수박을 갈랐다/그러자 쩍 소리와 함께 시커먼 어둠이 보였다") 하지만 수박의 어둠속에는 "여름 계곡의 물소리가" 있고 "계곡물로 차가워진 수박과 웃고 떠드는 아이들, 여름의 빛과 근교 유원지의 나른한 소란스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고 시원"했던 수박의 맛이. 그 후로

"우리의 삶은 결코 해명되지 않은 작은 비밀을 끌어안은 채로 계속된다." 품에 끌어안은 이 작은 비밀들에게도 영혼의 날개가 달려있을까.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하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여름은 뭐였을까" 그건 끝끝내 낱낱이 밝혀지지 않고 남아 있겠지만 다행인 것은 그러하기에 그 어둠 속에서 끝없는 질문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사진은 더 이상 들여다볼 이유가 없으므로. 수박을 가르고 시집을 펴고 어둠을 쪼갠다. 무언가 날아오른다.("레오파르디는 이렇게 말한다. (....) "notto(밤), notturno(밤의) 등의 말들, 밤에 대한 묘사들은 아주 시적인데, 밤이 물체들을 뒤섞어 놓아서 모호한, 불명료한, 불완전한 이미지들만을 영혼이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oscurità(어두움), profondo(깊은)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칼비노, 『칼비노 문학 강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무척 좋아하는 장면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물론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지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월터와 사진가 숀은 눈표범을 (사진으로 찍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눈표범을 마주치는 일은 드물고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쉽지 않다. 드디어

눈표범이 나타난 순간 사진가 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월터는 왜 사진을 찍지 않느냐고(그럼 이렇게 고생하면서 왜 기다린거야?) 물어본다. 사진가 숀의 대답.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그래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ㅡ마음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본다. 먼저 「마음」이라는 시. 시는 '너'가 멀리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너는 아직은 떠나지 않았다.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미래(너가 떠날 먼 곳)에 가 있다.

"가서는 제철 음식을 먹기로 했다 초봄에 어울리는 여리고 어린 쑥과 향기로운 더덕, 살이 오른 어류들, 평소에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많이 먹어본 적 없는 것들을 너는 떠올린다."(너는 아직 떠나지 않았고 아마도 아직 너의 몸은 집에 있겠지만 마음은 이미 먼 곳에 있다. 마음은 여리고 어린 쑥과 향기로운 더덕, 살이 오른 어류들에 가 있다.)

"너는 인적 없는 바다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데 놀라며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며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너의 마음은 먼ㅡ 바다에 가 있다. 그리하여 너는 미리 감탄한다. 아직 보지도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미리 기뻐한다."기쁨은 이렇게/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찾아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멀리 떠나기 전 몸은 집에 있고, 마음은 먼 곳에 있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도래할 기쁨을 미리) 기뻐하고 있었는데 막상 집을 떠나 도착한 바다에서 너는 눈을 감고 죽음을 생각한다. 이런, 바다에 미리 도착해있는 줄 알았던 (기뻐하는) 마음은 어디로 갔지? 너의 몸은 바다에 왔는데, 너의 마음은 출발하지도 않고 집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슬픔은 바닥을 뒹구는 깨진 유리병 사이에 앉아 돌아올 너를 상상하고 있었다." 사실 너는 내내 슬펐다. 시가 진행되는 내내 너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너는 먼 곳을 생각하고 먼 곳의 아름다움과 먼 곳의 기쁨들을 생각했다.("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사랑하고 너무 좋다고 생각하며 너무 좋아하면서") 그렇게 슬픔은 슬프게도 홀로남아ㅡ

마음에 대한 이 시는 기쁨이 온전한 기쁨으로 존재하는 상태에 대한 구절로 마무리된다.

"시몬 베유(『중력과 은총』)가 얘기했던 것. "완벽한 기쁨은 기쁘다는 그 느낌마저 배제시키는데, 그 대상으로 가득 찬 영혼에는 '나'라고 할 만한 구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오션브엉,『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상황에 대한 또 다른 시 「잃어버린 천사를 찾아서」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과(그렇지만 사실 사랑에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 기쁨이 그런 것처럼 슬픔이 그런 것처럼 아름다움이 그런 것처럼 사랑에는 준비가 필요없다. 사랑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이니까) 사랑을 시작하기 직전의 순간이 있다. 하지만 형식은 자꾸 머뭇거리고 생각을 한다. 그것도 바깥에 대한 생각. 어쩐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니 자꾸 생각을 하게 되고 설명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영화나 드라마라면, 이라고. 하지만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 드라마나 영화가 될 필요가 있나.(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삶은 결코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랑이 이루어지기 직전,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도 같은, 삶의 드물고도 아름다운 순간에 형식은 자꾸 바깥이 신경쓰이는 것이다. 그리고

"겨울밤
사람들의 입에서는 조금씩 영혼이 흘러나오고 있다."

형식이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현재 안에 온전히 자리잡지 못하는 동안에도 영혼은 조금씩 흘러나와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영혼은 한 군데에 고이지 않는다, 영혼은 머무르지 않는다("찻잔 위로 피어오르던 김은/흔들리다 곧 흩어진다" 「개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이 전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시에는 안과 밖의 분리가 있다. 형식과 영대가 있는 실내 그리고 (아마도) 유리창을 사이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의 왁자지껄한 거리. 실내는 어둡고 바깥은 환하다. 실내는 조용하고 바깥은 왁자하다. 그렇다면 실내와 바깥은 잘 분리되어 있는가? 그런 것 같지 않다. 거리의 밝은 빛이 실내로, 영대의 얼굴로 드리워지고 거리의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롤이 조용한 실내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바깥이 흘러든다. 어째서?

"갑자기 찾아온 침묵(갑자기 찾아온 천사)을 견디기" 위해서. 사랑은 아마도 말이 필요없는 순간일 것이다. ("모든 것이 투명해졌는데, 분명 내 영혼도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나의 내면에 몰입했고, 거기에 정적이 있었다."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그러나 형식은 말이 없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형식은 천사가 찾아온 순간에도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영화를 떠올리거나 바깥을 생각한다.

밤은 고요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노래 구절이잖아. 우리는 노래가 말해주는, 드라마가 말해주는, 영화가 말해주는, 세상이 말해주는 방식으로만 밤을 경험하는 걸까. 그러면 고요하고 거룩한 밤 말고 그냥 밤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밤은 어떻게 경험되는 것일까. 설명된 적 없던, 결코 알지 못하는, 세상의 처음처럼 찾아오는 그런 밤은.

"사람들은 아직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밖을 헤매고"
형식(의 마음 혹은 영혼) 역시 이 중대한 사랑의 순간 직전에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단지 (안팎을) 헤매고만 있다. 사랑이라는 집에 마음을 머무르게 하지 못한다.

여기서 잠깐 돌에 대한 다른 시를 펼쳐본다. 왜냐하면 시가 시작된 후 내내 형식은 '직전'의 순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직전의 순간. 그리고 직전의 순간에 돌이 되어버린 영혼이 나오는 시가 있다.

("돌은 사랑한다고"「금과 은」) 말하고 싶지만 ("돌은 입을 열기 직전"「금과 은」)이었지만 결국 입을 열기 직전에 돌이 되어 버렸다.

(사전을 펼치는 시간. 망부석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망부석
남편을 기다리는 돌. 아내가 멀리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돌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그리움에 서서 바라보다가 결국 돌로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돌 안에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랑(의 감정)이 봉인되어 있는 걸까. (결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멀리 바깥에 나가 길을 헤매고만 있는 사랑을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린 영혼. 그러는 사이에도

"말 없는 영대의 입에서 영혼의 흐린 빛이" 흘러나오고.

형식은 바라보며 천사가 떠나고 있다고 생각한다(생각 좀 그만해!!) 물론 시가 끝나가는 중에도 형식은 여전히 직전의 순간에 머물러 있고. 어쩌면 천사가 떠나간 게 아니라 형식이 천사를 떠밀어 떠나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 장면을 구성하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천사가 잠시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것. 마지막 구절까지 형식의 사랑은 어떤 (존재하지 않는) 영화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원래 이 장면을 구성했어야 하는 영대와 형식의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과연 형식이 잃어버린 것은 천사일까 아님 사랑일까. 사랑은 입을 열기 직전에 돌이 되었다.("그 돌을 찾아야 한다"「금과 은」)

존 레넌이 이 시를 마무리한다. 존 레넌은 말했다. "당신이 뭔가 계획을 세우느라 바쁜 동안 그대에게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곧 인생이다."

ㅡ데스 드랍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화자가 버스를 타고 있을 때 마음에 품은 생각 하나 "사람 없는 가로수길을 보며/내 삶이 저거였으면 좋겠다", 생각 둘 "소나기라도 떨어지면 좋을 터인데"

그리하여 그렇게 된다. 럭키! 시에서는 무슨 일이든 이루어질 수 있지. 갑자기 고장이 난 버스가 멈추고(사람 없는 가로수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지다니. 하지만

"그새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은 내릴 수 없다고 하네" 결국 화자는 내릴 수 없다. 마음에 품고 있던 장면이 짠ㅡ이루어졌는데도 결코 그 장면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없다. 어째서? 분명치는 않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다만 나는 이 장면에서 쉼보르스카를 생각한다.

"우리는 꿈꾼다, 하지만 아주 부주의하고, 아주 부정확하게 말이다! "새가 되고 싶다"고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떠들어댄다. 하지만 친절한 운명이 그 사람을 칠면조와 맞바꿔준다면, 틀림없이 실망을 금치 못하리라. 궁극적으로 그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을 테니."(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ㅡ증오

이 시는 좀 재미있는데 그건 물론 나의 해석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를 영혼의 장난으로 해석하였다. 심지어 영혼은 어떤 (물론 긍정적 의미의) 만행까지 저지르냐면 무려 시의 제목이 되는 글자에 장난을 쳐 표기에 오류가 있도록 하였다는 것.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이 시의 원래 제목은 「정오」이다. 그런데 시의 내용에서 영혼이 친 장난처럼(표기를 표고로 바꾼다) 시의 (짐짓 엄숙한) 제목은 정오에서 증오로 바뀌어버린다.("역시 영혼일까요?") 선생님이 묻고 나는 머리를 긁는데 이 때 머리를 긁는 건 나일까 아니면 나의 영혼일까? 이때의 영혼은 아마도 오류라는 이름의 장난기 가득한 영혼일 것이다. 이 영혼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장소(오류동)에 살고 있다.(시집의 많은 불행한 영혼들이 제 집에 살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호프는 독일어이지만 호프집은 한국어다」를 생각해보라. 호프라는 영혼(아마도 그런 영혼이 있다면 맥주를 좋아하는 영혼이겠지)은 호프집에 거주할 수 없다. 국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일을 좋아할까 장난을 좋아할까. 지금은 점심시간.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잠시 쉬고 영혼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정오가 끝나면 점심시간도 끝이난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일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오가 되었을 때 사람은 다시 일을 하고 오류라는 이름의 영혼은 자신의 거주지인 오류동으로 잠시 물러난다.(아마도 사람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어쩌나,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영혼을,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시를.("그녀가 무엇보다 좋아한 건 그의 짓궂은 장난기였다. '장난기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진대'" 크리스티앙 보뱅, 『흰 옷을 입은 여인』)

ㅡ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화자는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꿈들은 어떤 마음에 대한 것인데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아직 모른다. 첫번째 꿈에서는 영문을 모르는 채 심경을 밝히라는 재촉을 받는다.(모르는데 어떻게 밝혀요?) 두번째 꿈에서는 마음과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바람 부는 절벽에서 나는 무서워 떨고 있는데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누가 뒤에서 민다. 그리고 계속되는 꿈들에서도 내 마음 같은 꿈은 없다. 말 그대로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것. 그런데 마음이 뭐지? 시 속의 나는 생각한다.(그러게, 마음은 뭐지? 시를 읽는 독자도 머리를 긁으며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다시ㅡ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나는 생각한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어째서? 왜냐하면 나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왔으니까. 게다가 언어적으로 봐도 완벽하다. 토끼풀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있으니까. 토끼풀이 마음이라면 토끼는 토끼풀이 마음둘 곳, 바로 토끼풀이 머무르게 되는 집이라는 것. 몸과 마음이 서로에게 집이라면 토끼풀의 집은 토끼이고 토끼의 집은 토끼풀일 테다. 이거야말로 마음과 몸이 따로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되는 상황이잖아. 여기서 잠깐 토끼풀 이름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면 여러 개의 설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토끼풀이란 이름에는 많은 속설이 따른다. 토끼가 잘 먹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1900년대 초. 토끼를 기르기 위한 사료 작물로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됐기 때문이라고 알려진다"(그렇다고 한다)

토끼가 토끼풀을 먹는다. 토끼풀은 토끼 안에 있다.(마음이 몸 안에 있듯이) 그렇게 토끼풀(마음)과 토끼(몸)는 하나가 된다.(이에 반해 호프는 호프집과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언어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호프는 독일어이고 호프집은 한국어니까)

시에 따르면 토끼풀은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삶을" 사는데 이런 묘사는 시 속의 화자가 바라는 마음의 모습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마음은 (사진처럼) 어떤 한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고여 있지 않다. 토끼풀이라는 마음은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난다. 물론이다 식물이니까(시집에는 무럭무럭 자라는 식물의 이미지가 반복되는 심지어 어떤 식물은 너무도 열심히 자라나 집보다 커지기도 한다. "나무 하나가 너무 크게 자라 마당이 다 뒤집혔는데" 「드워핑」 그치, 때로 어떤 영혼은 그걸 담는 그릇보다 더 커다래지기도 하는 것이다.) 시집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식물이 먹고 자라나는데 필수적인) 물(흘러감)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물은 대체로 강물이거나 어딘가로 흐르는 물이다.("강물은 흘러 흘러 남해로 가고" 「고요의 풍속은 영」 그렇다.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갈 것이다. 왜냐하면 강물의 집은 바다일 테니까) 강물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고 저녁이 흐르고 역사도 흐른다.("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고요의 풍속은 영」) 마음은 사진이 아니다. 마음은 고여있거나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마음은 하늘 아래 토끼풀처럼 흔들리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마음이 분홍빛의 흘러가는 저녁처럼 흐르고 있다.("하지만 그의 영혼에는 가벼운 분홍색 흔적 같은 게 남아"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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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시인선 194
황인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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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영혼이 도망다니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특히 시는 더 그렇지. 시의 영혼은 가볍고 발이 빠르고 액체의 몸을 가졌으며 날개도 있다. 카멜레온처럼 몸의 색깔도 변하고 심지어 투명함도 이용할 줄 아는데 장난기도 많고 게다가 미끄러워서 포착하기 쉽지 않음 마치 나비처럼. 그러나 손에 쥘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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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외투 문학동네 시인선 193
김은지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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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내가 피아노 앞에 앉아 낯선 악보와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다. 처음보는 곡을 연주한다고 할 때에 내가 그 곡을 연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악보를 따라 한 번 쳐봤을 때? 두 번 세 번 쳐봤을 때? 건반 위의 손가락에서 서툴지 않은 자연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나에게 음악 감상이라기보다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더 가까운 의미라면,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까지 책과 나는 몇 번의 만남을 가져야 할까 우리는 얼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할까. 어쩌면 독서에서의 나의 연주는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 책에 대한 글쓰기를 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연주가 서툴다해도 그건 악보 탓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세상의 서툰 연주자에게 위안이 되는(여름 외투 같은) 문장을 선물한다면.(주섬주섬 에코백에서 꺼낸다)

"하나의 작품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란, 능란하지 못한 손가락에 의해 음조 어긋난 피아노에서 이끌어내진, 부정확한 음들 위로 나타나는 세계일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었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ㅡ1월의 트리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되었다. 화자의 새해 목표는 아마도 일본어 공부인가보다. 1월이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 있는 카페에 앉아 일본어 교재를 펼친다. 낡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대에 뒤떨어진, 1월의 트리 같은 단어들. 세상은 흘러가는데(회화 연습 문장들은 발빠르게 시대를 반영한다. "비건의 음식 주문/한부모 가정의 하루/동성 연인을 꿈꾸는 에피소드") 단어들은 낡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더이상 형식이 내용을 담지 못한 채 1월의 트리 아래 놓여 있는 텅 빈 선물 상자들처럼. 화자가 펼친 언어 교재 속에서, 그리고 화자가 앉아 있는 1월의 트리 옆에서 언어는 좀처럼 현재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얼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될까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뒤쳐졌던 언어는 언젠가 현재에 꼭 맞는 옷을 입게 될까. 다음 순간 화자가 맞이하는 풍경처럼. 페이지를 넘기다 눈과 내리다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눈은 유키/내리다는 후루") 창밖으로 펑펑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언어와 현재가 일치하는 어쩌면 드물게 아름다운 순간.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며 화자는 외운다.
눈은
유키
내리다는
후루
눈은
유키
내리다는
후루
조용히
충분히
외운다
.
.
.

ㅡ여권

"나는 포르투갈어로 쓰지 않는다. 나는 나를 쓴다."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이 지점에서부터 그녀는 "문학적 국적이랄 수 있는 상상 속의 국적을 채택했다"고 언급한다"(이언 블라이스, 『엘렌 식수』)

외국을 여행하고자 하면 여권이 필요하다.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이 하나의 나라라면 시집은 시인의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여권일 것이다. 시인이 여권(시집)을 떨어트린다. 우연히 서점의 서가를 걷고 있던 나는 그가 떨어트린 여권(시집)을 주워들고 시인의 나라에 입국할 준비를 한다. "태어난 곳과 쓰는 언어와 지금 사는 곳이 다 다른 시인"의 나라.

"나는 늘 출애굽기의 이 구절이 좋았다. "나는 낯선 땅의 이방인이었다." 작가들, 독자들, 번역자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 여행을 했다. 우리 모두 여러 낯선 땅의 이방인들이었다."(시리 허스트베트, 『어머니의 기원』)

ㅡ여름 외투

아마도 여름이다. 어쩌면 늦여름일지도 모르겠다. 화자가 하루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문득 날씨(바람에 든 꿀처럼 쾌적함)를 깨닫는 건 어째서? 아직은 여름이라 실내에는 에어컨이 가동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루종일 내면의 풍경을 걷고 또 걷느라 바깥의 날씨를 알아챌 겨를이 없어서?) 화자는 (아마도 실외기가 돌아가는 풍경을 응시하며) '실외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풀어보는데 실외기는 곧 '바깥 기계'. 그렇다면 '외투'라는 말도 풀어볼 수 있을까? 바깥 덮개.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바깥 덮개 역시 어떻게 보면(정면에서 보면) 섭섭한 이름처럼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이 시의 화자가 낙산에서 내려다보던 도시의 측면처럼 측면에서 보면)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같다. 바깥 덮개. 여름 외투.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단어가 만나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된. 여름이 추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할지도 모르는. 어쩌면, 시인의 에코백에 항상 들어있는 니트 가디건처럼("내 에코백에는 항상/니트 카디건과/가벼운 우산이 들어 있다"「포도」) 여름이 추운 누군가라면 아니, 바깥의 날씨와는 상관없이 내면의 날씨에 황량한 겨울이 찾아온 누군가라면 에코백에 항상 시인의 시집 『여름 외투』를 넣어가지고 다녀야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깥의 겨울보다 추운 내면의 날씨에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집일 테니까.

덧)화자는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럽다고 했지만 '형광'의 사전적 의미는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 신기하다 그저 글자를 읽어내려갔을 뿐인데 (누군가 세상의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문득 눈앞에 어둠이 가득하다. 잠시 후 아름다운 '형광'들이 깜박이며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ㅡ만일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누군가를 '안다'는 건 무엇일까. 첫째, 이름을 안다. 둘째, 한 번 만난다. 셋째, 몇 번 만난다. 넷째, 대화를 나눈다. 다섯째, 함께 시간을 보낸다. 여섯째 .... 나는 너를 언제부터 알고 어디서부터 알고 어디까지 알고 얼마나 아는걸까,에 대한 물음들이 이 시에는 들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아, 나는 그 사람을 몰라. 하지만 우리가 알거나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제까지나 부분집합일 것이다. 시에서 화자는 드라큘라라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반 헬싱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고 드라큘라라는 영화를 봤지만 여전히 반 헬싱이라는 캐릭터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어쩌면 "구름 사진에서 도룡뇽을 찾"는 것과 같을 수도 있지만.(시집 『여름 외투』에 수록된 시들에는 이런 정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알아봄에 대한 어긋남 같은 것("내가 알던 한 그루의 큰 나무는/다가가서 보니/세 그루의 큰 나무였고"「어제 새를 봤어」).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처럼 언제나 당신을 궁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온전히 안다는 게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궁금해하기. 좋아하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대사처럼.("우리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어요")

덧)"절판된 시집을 구해서 읽는 세계가 있다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을 걸어봤니"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곳으로 가는 길을 함께 걷고 싶다.

ㅡ기역이라는 의자에 앉은 바다
"나는 바닥을 확인하고 싶었고/걸으면서/두 바퀴를 돌았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달이 보였다"

발바닥에 단단하게 와닿던 바닥이 시의 세계에서는 단지 두 바퀴만 뱅그르르 돌아도 어느새 출렁(깊은 곳일지도 몰라 조심해!)~ 바다가 된다. 「기역이라는 의자에 앉은 바다」 식으로 말한다면 '시'라는 단어는 'ㄹ'이라는 투명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인지도. 그리하여 'ㄹ'이라는 의자에 앉은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어지고 연결된다.("그가 나한테 물어볼 때면 항상"에서 'ㄹ'이 문장에서 해방되어 공처럼 잔디밭 위로 휙 날아가버렸다"(카프카, 『카프카의 일기』)

ㅡ털모자의 보풀을 떼어내는 20분

"그는 새로운 것보다는 '낡은 것'에 집착했다. 쓸모없는 것에서 쓸모를 발견하고,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해보이기 때문에 거창하고 세련된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던
어떤 것들을 말하거나 실천하는데서 즐거움을 느꼈다."(권용선,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다 읽지 못한 책을 꽂아둔 칸에는/낡은 것들의 힘이 있고/그 책을 사서 조금 읽었을 때 나는/허름한 옷을 영원히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낡음'이 긍정의 뉘앙스라면 그것은 그 낡음(의 대상 혹은 관계)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상 니트에는 보풀이 생기지 않으니까. 시인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것 혹은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하는 것(「예시와 호박」)은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신형철 평론가에 따르면)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나누는 일이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줄 수 있다. 생명은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시간이라는 형태로 분할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시집 『여름 외투』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꼭 샌드위치 같다. 시공간이 전혀 다른 개별 장면들이 시치미를 뚝 뗀 채 샌드위치처럼 포개져 있다. 이 시도 그러한 편인데 하나의 장면에서 화자는 지금 털모자와 털장갑의 보풀을 제거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주의'라는 단어와 관련된 장면들이 있다. '주의'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보풀을 제거하는 화자의 가위질 사이사이에 다양한 의미의 '주의'가 끼어든다. 그리하여 의아하게 느껴지는 시의 마지막 구절까지. ("시간의 보풀을 제거하고/이 잘 만든 장갑을 계속 쓸 거다/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보통 잊어버리는 건 기억이고 잃어버리는 게 장갑이다. 왜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가 아니고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쓴 걸까. 시간의 보풀 속에서 화자가 잊어버렸던 것은 무엇인지? (허름한 옷을 영원히 입고 싶었다는 마음인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생태주의로 시작한 이 시는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주의(다짐)으로 끝난다.

덧)경험주의적으로 말하자면 니트류의 보풀을 가위로 제거하는 건 진짜로 재밌다. 매년 털장갑의 보풀을 제거하는데 제거할 보풀이 좀 더 많았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하니까.(잠시 후 가족들에게 외치는 소리. "보풀 난 니트 공짜로 제거해드립니다!")

ㅡ슬픔과 기쁨의 개 인사

시의 화자와 비슷한 착각을 나도 하였다. 시집 『여름 외투』에 수록된 「포도」라는 시. 읽자마자 나는 당연히 제목에서 말하는 포도가 보라색 여름 과일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아니었고. 그런데 이 착각은 시인의 의도가 아니었을지. 포도라는 제목 옆에 독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런 투명 표지판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착각(혹은 오독)의 길로 가시오")

"누가 누구와 친해지느냐에 따라서/그 사람의 시가 달라진다면"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독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읽는 사람이 누구와 친하느냐에 따라 시의 독해가 달라진다는 것. 개와 친한 사람은 개인사를 개 인사로 읽게 된다는 것. 시인은 "시의 제목을 오독한 후 그 시가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작가의 의도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해석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겠지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어질 것이다. 문학은 어긋남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일 테니까.(나는 사랑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오독을 한 후 작품을 더 좋아하게 되는 그런 독서가 분명 작품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 믿는다.

덧)이것은 독자인 내가 누구와 친하느냐에서 비롯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시에서 커다란 슬픔을 보았다. 슬픔은 다른 단어와 문장들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제목을 포함한 이 시의 제일 첫 단어는 '슬픔'이다. 이 시는 4부에 나오는 「연면」이라는 시와 같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나도 그렇다.(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하루」에는 무지막지하게 사로잡힌 인물이 나온다) 시의 화자처럼 그리고 나처럼 비슷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곤도 구미코의 말없는 그림책 『슬픔의 모험』을 추천하고 싶다.

ㅡ소리 줌인

"오리가 꽥꽥거리고"

"아까 지나갔다가 다시 마주친 말티즈가/오리 소리를 들으려는 듯/멈춰 섰다"

이렇게나 슬픈 장면이 다행인 것은 나에게도 오리가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리 소리는 내가 시집 『여름 외투』에서 들은 첫 번째 소리였다. 꽥꽥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 닿았고 나는 귀기울였고 시집에서는 점점 더 많은 소리들이(들리지 않는 빗소리까지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너무 목소리가 작아"라고 말하는 시인이라면 장르를 잘 고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을 포함한 모든 카테고리의 책 중에서 시가 가장 고요한 장소니까. 시에서는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고, 꽃이 지는 소리도 들리니까. 그리고 분명 시에서 들리는 그 어떤 작은 소리라도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으니까.

덧)어쩐지 함께 읽고 싶어지는 책(아키코 부시,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에서 몇 구절 인용(또는 재인용)한다.

"뭔가 보이지 않을수록 주변에 있다는 게 확실하다."
조지프 브로드스키
"데이비드 미첼이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권력, 시간, 중력, 사랑. 정말 강력한 힘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다."고 쓴 대로다."(그리고 아마 상상력도)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가 "시는 보이지 않는 사제"라고 말한 것처럼 시야말로 보이지 않는 상태와 가장 잘 맞는 매체일 것이다."

ㅡ타이레놀에 대한 어떤 연구

눈 앞의 조명을 바라보며 카페 2층에 앉아있는 화자는 아마도 타이레놀을 먹었을 것이다. 시에서 직접 말해주지는 않지만. 부츠코를 나도 모르게 까딱까닥하고 있는 까닭을 여럿 늘어놓고 있지만 아까 먹은 타이레놀도 한몫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타이레놀은 마음 통증에 조금 효과가 있는 것인지.

눈앞에 있는 동그란, 하지만 완전히 동그랗지는 않은 조명을 응시하며 조명을 묘사하던 중

"내 앞에 놓인
등"

이라는 말이 쿵ㅡ하고 떨어졌을 때 지금껏 화자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카페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등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혹시 이건 돌아선 누군가의 등인 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왜냐하면 조명은 상처가 나 도려낸 사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이 상처는 사과의 상처인지 조명의 상처인지 아니면 바라보고 있는 이의 상처인지. 왜냐하면 타이레놀은 사과가 먹은 게 아니고 조명이 먹은 게 아니고 이 모든 여러 개의 그림자("조명 아래 조명의 그림자가/커다랗게 두 개/그리고 작지만 진한 그림자가 두 개/더 진한 그림자가 하나 있는 것을 본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먹었을 것이므로.

ㅡ증폭
"오래도록 좋아해온 향에 대해 더 깊이
모르게 되었다"

사실 시 전문의 맥락에서 뚝 떼어내 이 시구만 가져온다면 분명 깊이 좋아하게 될 것만 같은 문장. 하지만 시의 맥락 안에서 읽는 마지막 문장은 말도 못하게 슬프다. 착각이 증폭되고 알지 못함이 증폭되고 슬픔이 증폭된다.("어제처럼 가까우면서도/어제처럼 아득한"「가게 보기」) 내가 오래도록 좋아해온 너무도 익숙한 아카시아꽃의 향은 사실 이름부터 틀려먹었고, 나는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알고 있기는 했던 걸까. 미세한 차이라는 건 어쩌면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것이었는지도.(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에 그런 게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크레바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리하여 안다고 생각하던 나의 모름은 까마득하게 증폭되었다.

덧)1.이 시의 제목인 '증폭'이라는 단어를 앞선 시 「소리 줌인」에서 최선을 다해 꽥꽥거리는 오리에게 건네주면 좋을텐데.

2. 그런데 혹시 시집 『여름 외투』에 '어제'라는 단어가 열세 번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지.

ㅡ예시와 호박

시집의 맨 뒤 이소연 시인의 발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어쩌면 우정이란 일부러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일이 아닐까?"(그리고 나는 시집 『여름 외투』를 읽으며 시 역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시의 제목에 (개인적으로) 부제를 붙여본다면 '잃어버린 시간의 연속성을 찾아서-시간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리기에 대하여'정도로 하고 싶다. 시에 나오는 장면들(시간의 연속성을 온전히 경험하는 장면이든 아니면 시간의 불연속성을 깨닫지 못하면서 경험하는 장면이든 (시간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눈 뜨고 시간 베이는 장면이든)은 대체로 다 사랑스럽다. 시 속에서 시간이 엿가락처럼,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서처럼 몽롱하게 늘어난다. 물론 누군가(어쩌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 속 시간 도둑)의 으슥한 손에 들려있는 가위가 엿가락을 싹둑 잘라버리는 순간도 있다.("인스타그램을 잠깐만 하고/양팔을 어깨 위로 올려 스트레칭을 하면서")

언젠가 봄에 양귀비 꽃을 집에 들인 나는 초록색 통통한 붓 같은 양귀비 꽃봉오리가 붓 끝자락에서 빨간색(또는 노란색 또는 주황색 또는ㅡ) 혀를 빼꼼 내밀다가 점점 갑갑한 초록색 외투를 벗어내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커ㅡ다란 기지개를 켜며 (톡ㅡ 초록 외투가 땅에 떨어진다) 활짝 피어나는(꽃이 피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 모습을 관찰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고. 꽃봉오리 상태로 들여온 양귀비들이 분명 잠들기 전 확인했을 때는 초록색 붓이었는데 밤새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확인해 보면 아름다운 색을 뽐내며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꽃으로 바뀌어 있는 게 신기해서(그리고 왠지 억울해서, 왜 나만 못 봐!!!) 시간을 들이기로 결심한 거다.(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그 고요한 봄날에 나는 양귀비꽃과 함께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나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 식물은 결코 정적(靜的)이지 않다는 것을. 다만 인간보다 훨씬 더 깊은 시간을 경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시에도 있다. 호박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험. 책과 (언제까지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험. 나이 많은(하지만 영원히 아가이기도 한) 개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험.

덧)1. 이 시에 나오는 시간(의 연속성)은 메리 루플의 「반려동물과 시계」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2. 덕분에 알고리즘이라는 단어가 수학자 이름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시는 시간의 연속성만 경험하게 해주는 게 아니다. 시는 지식도 준다.

"알고리즘(algorithm)이란 용어는 수학자이자 바그다드 왕립 의회 의원이었던 Mohammed Al Khwarizmi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일련의 순서화된 절차로,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ㅡ어제보다 7도 높아요

시에는 7이라는 숫자가 반복된다.(근데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우연인 것인지 아니면 행운의 숫자이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시에서 경험하는 난생 처음 겪는 추위는 불행인지 아님 다행인지) 난로 위에 올라간 귤 일곱개. 시의 이 부분에서는 귤 냄새가 확 퍼지는 것 같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것 같은 추운 날씨 때문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시이지만 사실 이 시에는 그 어느 겨울보다도 많은 온기가 느껴진다. 시의 입구에서부터 난로가 준비되어 있고. 이 작은 난로 하나에 바싹 다가와 따닥따닥 붙어 있는 어른 셋(사람이라는 온기). 난로 위에는 나눠 먹으려고(마음이라는 온기) 누군가 가져온(부스럭부스럭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낸)태양 빛깔의 노란 귤이 하나도 아니고 7개,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터지는 웃음. 어제보다 7도 높아요, 라는 말 그대로 어제보다 7도나 따뜻한 문장(문장이 핫팩처럼 따끈따끈하다). 날이 너무 추워 입 안에서 출발한 문장은 당신에게로 건너가는 동안 조금씩 얼어붙는다 일곱빛깔 무지개 모양으로. 그렇게 시는 무채색의 차가운 겨울 풍경에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의 색을 아름답게 풀어놓으며 마무리된다.

ㅡ초여름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데? 초여름에 수박을 먹는다고? 하다가 생각해본다. 혹시 길지 않은 이 시에 초여름에서 한여름(맴맴ㅡ창밖으로 매미 소리가 들린다)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곱게 접혀 있는 것은 아닌지. 세 장의 편지를 꽉꽉 채워 쓰기까지, 누군가에게 재잘재잘 실컷 말을 걸기까지, 그리고 문득 편지를 안 줘야지, 라는 놀라운 생각을 생각해내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닌지(먹다 남은 수박을 다시 꺼내 먹으며 생각해보는 것이다).

ㅡ연면
시의 제목을 오독한 후 그 시가 더 좋아졌다고 말하는 시인처럼 나는 이 시의 제목을 오독한다 그리고 더 깊이 슬퍼한다. 내 눈에 이 시의 제목은 '연명'이라는 단어의 'ㅇ'자에 눈물방울이 떨어져 'ㅇ'자가 'ㄴ'자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시의 모든 문장들 위로 두두두둑ㅡ눈물방울이 떨어진다.

ㅡ중간고사
"제자리에 없는 책과"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구간 서고"에서 제자리에 없는 책을 찾느라 이리저리 서가를 옮기는 사서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 안쪽, 깊은 우물과도 같은 곳에 있는 서가를 상상한다.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서가. 그곳의 사서는 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내가 찾는 시는 (그게 무엇이든) 결코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고.

하지만 제자리라는 게 도대체 뭐지?

시에게는 어쩌면 제자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늘 제자리에 없고, 책 읽는 사람 역시 언제나 제자리에 없다. 방문 바깥에 걸린 팻말에는 <행방불명중>("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이바라기 노리코, 「행방불명의 시간」)

"애한테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이 문장은 몽테뉴가 한 말이 아니라 탑 밑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는 가족들이 한 말이었다."(엘렌 식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마음이라는 깊은 우물 속 서가의 사서가 된 시인은 시가 쉽게 찾아지지 않기를 바란다.("쉽게 찾아지지 않았으면 해/너무 쉽게는 말고/좀 어렵게 찾아졌으면 해")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 시(그러니까 책)를 찾아 미로 같은 서가를 돌아다닌다. 미끄러지고 후ㅡ먼지를 털어내고 발을 헛디디고 "아무리 가는 틈 사이도 빠져나갈 수 있"(「개별 토끼」)는 토끼처럼 자꾸만 사라지는 시를 찾아 "둔중한 오후"를 밀어낸다. 요즘 도서관에는 상호대차라는 서비스가 있다. 집 근처 도서관에 읽고 싶은 책이 없을 때 좀 더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를 신청하면 다음날이나 늦어도 다다음날 짜잔-하고 문자가 온다. 집 근처 도서관에 상호대차한 책이 도착하였으니 버선발로 달려오라고. 그러면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책날개를 달고) 쌩ㅡ날아가며 생각한다. 내가 상호대차한 이 책은 누가 배달하는 거지? 혹시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 사서가 책상 어딘가에 붙어 있는 지잉ㅡ버튼을 누르면 생각지도 못한 비밀스런 통로, 아주아주 기다란 통로의 문이 열리고, 사서가 통로 안에 우아하게 책을 밀어넣은 후 다시 버튼을 누르면 슈우웅ㅡ 우리집 근처 도서관에도 있는 비밀스러운 통로를 통해 책이 도착하는 것은 아닌지. "'딴 게 나타났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찾아온 게 맞을 것이다. 시의 나라에 시인의 나라에 행방불명의 나라에(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시인이 떨어뜨린 여권은 가지고 오셨는지). 이 나라에는 제자리라는 게 없어서 그게 무엇이든 찾으려면 시간을 들여 헤매야 하지만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문득 고래 뱃속에 도착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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