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전자책] 촛불의 미학
이가림 / 도서출판 빛나라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슐라르의 글은 너무 아름답지만 번역은 다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이 전자책은 번역도 번역이지만 오탈자도 너무너무너무 많아요. 같은 역자의 문예출판사는 좀 다를까요. 아름다운 글을 이렇게밖에 볼 수 없다니 슬퍼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리의 발견 (양장)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밀리 디킨슨 챕터와 관련

저자는 리처드 파인만의 과학적 지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예로 들며 예술가(에 대한 앎)과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리처드 파인만의 얘기처럼 꽃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더 깊이 알게 된다면 꽃에 대한 아름다움과 감동이 더 커질 것이라는 말에는 백번 동의하지만(그런데 이 경우에도, 과학적 지식을 아는 건 아름다움을 아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지, 과학적 지식을 모른다면 아름다움도 없다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레이첼 카슨은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때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먼저일 것이다) 이 생각을 예술가와 예술에 적용한다면, 예술가는 꽃이 아니라 꽃을 심은 사람이 아닌가. 꽃을 심은 사람에 대해 아무리 많은 걸 안다고 해도 꽃 자체를 경험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분명히 말해질 수 있는 예술가는 없다고 했고 동시에 예술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예술도 없다고 했다. 그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예술 자체(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예술가는 온데간데 없고 오직 예술만 존재하는 것)가 없다는 말이 예술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예술 자체가 없다는 생각을, 예술을 경험하는 존재(독자이거나 관람자)와 연결지어 생각할 때 더 풍부한 의미로 이어지지 않을까. 예술을 대할 때에 예술가를 무조건 떼어놓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얼마든지 함께 경험할 수 있지만 예술을 경험하겠다면서 예술가를 해부하듯이 파헤치는 일을 정말 예술가 본인이 원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예술의 진실은 예술가에게 있지 않다. 예술의 진실은 예술가처럼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정시킬 수 있다면 그건 디킨슨의 말처럼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겠지. 하지만 디킨슨의 말처럼 시인은 산문이 아닌 운문을 쓰고 독자 역시 운문을 경험한다.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관람자에게는 오직 각자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진실은 운문의 형식으로 도착하는 것인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개와 혁명」을 읽고 끄적임)

"나도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언젠가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태수 씨는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있는, 정원이라고 불리는 정원 아닌 곳을 좋아했다."

태수 씨가 좋아하는 요양병원 옥상에는 정원이라 불리지만 정원은 아닌 곳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족욕이라 불리지만 족욕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족욕을 하며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다 태수 씨에게 이런 말을 하지. "나도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에 앞서 나와 태수 씨가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병원 복도를 산책할 때에 병원의 모양은 양쪽이 정확한 대칭 구조인 데칼코마니.

"나는 태수 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복도를 빙글빙글 돌았다. 병원은 꼭 두 손바닥을 반듯이 펼쳐놓은 것처럼 정확한 대칭 구조였다. 양 복도 끝쪽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고 그 중심에는 각각 디귿 자 형태의 데스크가 있어 간호사들이 상주했다. 태수 씨와 나는 데칼코마니 같은 그 병원 복도를 밤새도록 돌았다."

작품 속 '나'가 생각하기에 나의 삶은 미지근하기 그지 없다. 나에게는 물론 뜻이 있지만 그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느껴지고. 오랫동안 미지근한 삶에 푹 담가둔 '내' 발은 그저 퉁퉁 불어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되고 싶어한 태수 씨의 삶은 어떨까. 노동과 투쟁과 혁명. '내'가 보기에 진짜 삶인 것 같은 근사한 것들을 도모하는 삶. 하지만 제목에서 밝혀진 것처럼 혁명은 태수 씨의 삶에서 밀리고 밀리고 밀려나 그 개(유자)의 뒷자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럴 때, 혁명이라는 단어의 미지근함. 결국 나의 삶과 태수 씨의 삶은 미지근한 물감으로 찍어낸 데칼코마니처럼 조금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닮고 싶은 태수 씨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었을까.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

나는 태수 씨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화자가 해주는 이야기만으로 태수 씨가 진짜 훼방을 놓는 사람이었는지 알아채기는 어렵다. 화자가 그런 사람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할 뿐. 오히려 훼방을 놓는 일화는 화자의 어머니에게서 얼핏 보여지고(태수 씨의 세탁소 페친과 술을 먹는 일화) 화자에게서도 얼핏 보여진다.(이전 회사에서 운영 팀과 회식을 할 때 고삼녀라는 단어를 두고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일화). 게다가 미지근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장면은 화자가 또는 등장인물이 어떤 그늘에서(어떤 지령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나는 수첩을 꺼내지 않고 차장님에게 말했다. 차장님, 평생 차장님으로 남아주시면 안 돼요?"

아버지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계속해서 수첩에 적힌 말로 아버지를 흉내내던 '나'는 작품에서 딱 한 번 수첩을 보지 않고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혹은 이런 장면,

"수진은 처음에는 나보다도 많이 울었지만, 곧 누구보다도 먼저 태수 씨의 병에 적응하고 이런저런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그랬다. 나와 엄마는 수진의 지시대로 태수 씨를 간병했고"

동생 수진은 아버지의 장례 프로젝트 핵심 인물이고, 이 낯선 상황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하는 인물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일을 진행하고 나와 엄마는 동생 수진의 지시를 따라 아버지를 간병한다. 화자가 핵심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에 비해 수진은 작품에서 핵심 인물의 지위를 얻지 못하며 성식이 형보다도 더 적은 분량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독자로서는 좀 아쉬웠다고 말해야 할까 혹은 의아했다고)

어릴 적 상상했던 아버지의 혁명(이라는 단어)은 근사했지만 결국 아버지 삶의 가장 근사한 혁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개"로 인해 이루어진다. 거창하기만 한 혁명이라는 단어는 그보다 작은 줄 알았던 삶이라는 단어에 휘둘리다 점점 졸아들었지만....

이 작품 자체도 혁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점점 졸아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화자의 삶은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이 내내 미지근했다지만 그 미지근한 물에서 독자 역시 건져올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화자는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난 후에야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화자는 내내 아빠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빠를 닮고 싶다고 생각할 리가. 그리고 어쩌면 그게 문제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미움 안에서 깨달은 미미한 사랑이 아니라 내내 존재하던 미움과 역시 데칼코마니처럼 쌍으로 존재하던 사랑. 그 때문에 작품은 미지근할 수밖에 없던 건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과 꿈 트리플 16
양선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쪽 분량의 이야기를 다 읽어내는데 솔직히 좀 힘들었다. 작품이 좋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내용도 묘사도 구성이나 완결성도 딱히 흠잡을 데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흠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읽는 독자도 아니고. 즐거우려고 하는 독서에서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페이지를 넘겨 나갈수록 (뭐랄까, 평지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은근한 경사가 있는 길이었다는 걸 다리가 깨닫게 된 것처럼 마음의 걸음이 느려지며) 읽기 힘들었던 건 좀 사소한 이유들이랄까, 하지만 때로는 사소함이 가장 커다란 장벽이 되기도 한다. 읽기 힘들다고 느낀 하나의 이유는 작가의 단어 선택인데 이 작품에만 해당되는 의도인지 아니면 작가의 고유함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일상적인 단어가 아닌, 딱히 어렵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딱하고 격식있게 느껴지는 단어들의 선택이, 아니 물론 그럴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정작 그런 단어가 주변의 문장이나 문맥과 어울리느냐 하면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다는 것. 내게는 문장과 문맥과 그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위한 섬세한 단어 선택이 아닌 단어를 위한 단어 선택으로 느껴졌다. 한두번이 아니고 몇번이나 계속 그런 단어들에 걸려 넘어졌다. (이런 넘어짐이 아닌 작품이 만들어내는 진짜 경험들 속에서 넘어지는 거라면 정말이지 몇 번이고 넘어지고 고꾸라져도 환영이다) 이런 단어의 선택으로 인한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작품 속 인물의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인물 A와 인물 B가 하는 말에서 같은 특징이 드러나는 언어 사용이 느껴진다는 것. 화자인 '그'와 택시 기사 할아버지가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의 특징이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 인물들이 낯설고 흔하지 않은 단어를 너무 자연스럽게 (그것도 구어체를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용하는데 이건 '그'의 목소리도 기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아니다.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건 누구의 목소리인가? 인물들은 인물 자체로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묘사하고 싶은 순간)에 도달하기 위한 목소리 없는 배우처럼 존재하는 걸까.

그리고 독자의 입장에서 어떤 느낌이 드냐면 (물론 나라는 독자 한 명에 대한 얘기다)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목소리도 좋고 묘사도 잘하고 유능한 이야기꾼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한 나머지 너무 즐거워하는 느낌이랄까. 독자도 같이 즐거워하고 싶은데 (물론 즐겁지만) 나보다 더 즐거워하는 이야기꾼을 바라봐야 하는 그런 느낌. 그래서 이 모임(작가와 작품과 독자)에서 독자인 내가 제일 소외되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은 작품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뒤에 수록된 작품에 대한 에세이에서 더 강하게 느꼈다. 작품은 작품 안에 무한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은 작품 속에서 음악처럼 메아리처럼 쏟아지는 화음처럼 분명하게 들리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 상태로,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대한 너무 많은 이야기는 작품이 품은 음을 단선율로 만드는 게 아닐까. 작품이 단정하게 접혀 캐리어에 잘 들어갈 수 있는(지퍼를 닫을 수도 있는) 모양이 되길 원하는 게 아니라면. 활주로를 자유롭게 내달리는 녀석처럼 작품에게 싱그러운 탈출의 기회를 주고 싶다면.

너무 부정적인 얘기만 하게 된 것 같은데 사실 사소한 삐걱거림을 빼고는 꽤 재미있게 읽었다.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장면을 적어둔다.

"죽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죽어서 싱그러운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이고요?"

(조심스럽게 드는 생각, 작가는 독자를 조금 더 믿어도 좋지 않을까)

"위대한 작품은 예술가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이때 극복은 작품에서 약점을 제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작품이 약점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는 것이다."(타르코프스키, 『시간의 각인』)

(같은 책)"예술가를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감상하고 수용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 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져야 할 때처럼, 아니면 적어도 그런 믿음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처럼, 특별한 상태의 영혼, 아주 순수한 정신적 잠재성을 보유해야만 한다."

나는 이 문장이 예술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독자를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 독서는 작가와 작품과 독자 사이 무언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행위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인간적인 건축 - 우리 세계를 짓는 제작자를 위한 안내서
토마스 헤더윅 지음, 한진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분함이 재앙이라고 얘기하는 책인데 어쩐 일인지 번역이 따분하고 밋밋하게 느껴집니다. 역자 소개도 없고 번역에서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게 AI인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런데 또 맞춤법은 틀렸네요. ˝인간의 감정을 건들이고 가지고 노는 식으로˝에서 ˝건들이고˝라는 단어는 없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birdb95 2025-02-0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자평을 좀 더 이어가자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계적이고 밋밋한 건축의 끔찍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에서 인간적인 건물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유머와 배짱을, AI 번역 문장도 가지고 있을까? 인간의 번역이 아닌 AI 번역에도 과연 유머와 배짱이 있을까 하는 생각. 물론 이 책의 번역이 AI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 책의 번역이 AI 번역을 생각나게 한 것은 맞아요. 기계적인 건축에 대한 이야기에서 기계적인 번역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것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