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외투 문학동네 시인선 193
김은지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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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내가 피아노 앞에 앉아 낯선 악보와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다. 처음보는 곡을 연주한다고 할 때에 내가 그 곡을 연주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악보를 따라 한 번 쳐봤을 때? 두 번 세 번 쳐봤을 때? 건반 위의 손가락에서 서툴지 않은 자연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나에게 음악 감상이라기보다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더 가까운 의미라면,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까지 책과 나는 몇 번의 만남을 가져야 할까 우리는 얼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할까. 어쩌면 독서에서의 나의 연주는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 책에 대한 글쓰기를 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연주가 서툴다해도 그건 악보 탓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세상의 서툰 연주자에게 위안이 되는(여름 외투 같은) 문장을 선물한다면.(주섬주섬 에코백에서 꺼낸다)

"하나의 작품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란, 능란하지 못한 손가락에 의해 음조 어긋난 피아노에서 이끌어내진, 부정확한 음들 위로 나타나는 세계일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었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ㅡ1월의 트리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되었다. 화자의 새해 목표는 아마도 일본어 공부인가보다. 1월이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 있는 카페에 앉아 일본어 교재를 펼친다. 낡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대에 뒤떨어진, 1월의 트리 같은 단어들. 세상은 흘러가는데(회화 연습 문장들은 발빠르게 시대를 반영한다. "비건의 음식 주문/한부모 가정의 하루/동성 연인을 꿈꾸는 에피소드") 단어들은 낡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더이상 형식이 내용을 담지 못한 채 1월의 트리 아래 놓여 있는 텅 빈 선물 상자들처럼. 화자가 펼친 언어 교재 속에서, 그리고 화자가 앉아 있는 1월의 트리 옆에서 언어는 좀처럼 현재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얼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될까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뒤쳐졌던 언어는 언젠가 현재에 꼭 맞는 옷을 입게 될까. 다음 순간 화자가 맞이하는 풍경처럼. 페이지를 넘기다 눈과 내리다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눈은 유키/내리다는 후루") 창밖으로 펑펑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언어와 현재가 일치하는 어쩌면 드물게 아름다운 순간.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며 화자는 외운다.
눈은
유키
내리다는
후루
눈은
유키
내리다는
후루
조용히
충분히
외운다
.
.
.

ㅡ여권

"나는 포르투갈어로 쓰지 않는다. 나는 나를 쓴다."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이 지점에서부터 그녀는 "문학적 국적이랄 수 있는 상상 속의 국적을 채택했다"고 언급한다"(이언 블라이스, 『엘렌 식수』)

외국을 여행하고자 하면 여권이 필요하다. 시인이 그려내는 풍경이 하나의 나라라면 시집은 시인의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여권일 것이다. 시인이 여권(시집)을 떨어트린다. 우연히 서점의 서가를 걷고 있던 나는 그가 떨어트린 여권(시집)을 주워들고 시인의 나라에 입국할 준비를 한다. "태어난 곳과 쓰는 언어와 지금 사는 곳이 다 다른 시인"의 나라.

"나는 늘 출애굽기의 이 구절이 좋았다. "나는 낯선 땅의 이방인이었다." 작가들, 독자들, 번역자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 여행을 했다. 우리 모두 여러 낯선 땅의 이방인들이었다."(시리 허스트베트, 『어머니의 기원』)

ㅡ여름 외투

아마도 여름이다. 어쩌면 늦여름일지도 모르겠다. 화자가 하루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문득 날씨(바람에 든 꿀처럼 쾌적함)를 깨닫는 건 어째서? 아직은 여름이라 실내에는 에어컨이 가동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루종일 내면의 풍경을 걷고 또 걷느라 바깥의 날씨를 알아챌 겨를이 없어서?) 화자는 (아마도 실외기가 돌아가는 풍경을 응시하며) '실외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풀어보는데 실외기는 곧 '바깥 기계'. 그렇다면 '외투'라는 말도 풀어볼 수 있을까? 바깥 덮개.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바깥 덮개 역시 어떻게 보면(정면에서 보면) 섭섭한 이름처럼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이 시의 화자가 낙산에서 내려다보던 도시의 측면처럼 측면에서 보면)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같다. 바깥 덮개. 여름 외투.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단어가 만나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된. 여름이 추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할지도 모르는. 어쩌면, 시인의 에코백에 항상 들어있는 니트 가디건처럼("내 에코백에는 항상/니트 카디건과/가벼운 우산이 들어 있다"「포도」) 여름이 추운 누군가라면 아니, 바깥의 날씨와는 상관없이 내면의 날씨에 황량한 겨울이 찾아온 누군가라면 에코백에 항상 시인의 시집 『여름 외투』를 넣어가지고 다녀야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깥의 겨울보다 추운 내면의 날씨에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집일 테니까.

덧)화자는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럽다고 했지만 '형광'의 사전적 의미는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 신기하다 그저 글자를 읽어내려갔을 뿐인데 (누군가 세상의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문득 눈앞에 어둠이 가득하다. 잠시 후 아름다운 '형광'들이 깜박이며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ㅡ만일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누군가를 '안다'는 건 무엇일까. 첫째, 이름을 안다. 둘째, 한 번 만난다. 셋째, 몇 번 만난다. 넷째, 대화를 나눈다. 다섯째, 함께 시간을 보낸다. 여섯째 .... 나는 너를 언제부터 알고 어디서부터 알고 어디까지 알고 얼마나 아는걸까,에 대한 물음들이 이 시에는 들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아, 나는 그 사람을 몰라. 하지만 우리가 알거나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언제까지나 부분집합일 것이다. 시에서 화자는 드라큘라라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반 헬싱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고 드라큘라라는 영화를 봤지만 여전히 반 헬싱이라는 캐릭터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를 안다는 건 어쩌면 "구름 사진에서 도룡뇽을 찾"는 것과 같을 수도 있지만.(시집 『여름 외투』에 수록된 시들에는 이런 정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알아봄에 대한 어긋남 같은 것("내가 알던 한 그루의 큰 나무는/다가가서 보니/세 그루의 큰 나무였고"「어제 새를 봤어」).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처럼 언제나 당신을 궁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온전히 안다는 게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궁금해하기. 좋아하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대사처럼.("우리는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어요")

덧)"절판된 시집을 구해서 읽는 세계가 있다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을 걸어봤니"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곳으로 가는 길을 함께 걷고 싶다.

ㅡ기역이라는 의자에 앉은 바다
"나는 바닥을 확인하고 싶었고/걸으면서/두 바퀴를 돌았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달이 보였다"

발바닥에 단단하게 와닿던 바닥이 시의 세계에서는 단지 두 바퀴만 뱅그르르 돌아도 어느새 출렁(깊은 곳일지도 몰라 조심해!)~ 바다가 된다. 「기역이라는 의자에 앉은 바다」 식으로 말한다면 '시'라는 단어는 'ㄹ'이라는 투명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인지도. 그리하여 'ㄹ'이라는 의자에 앉은 시를 읽으면 우리는 이어지고 연결된다.("그가 나한테 물어볼 때면 항상"에서 'ㄹ'이 문장에서 해방되어 공처럼 잔디밭 위로 휙 날아가버렸다"(카프카, 『카프카의 일기』)

ㅡ털모자의 보풀을 떼어내는 20분

"그는 새로운 것보다는 '낡은 것'에 집착했다. 쓸모없는 것에서 쓸모를 발견하고,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해보이기 때문에 거창하고 세련된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던
어떤 것들을 말하거나 실천하는데서 즐거움을 느꼈다."(권용선,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다 읽지 못한 책을 꽂아둔 칸에는/낡은 것들의 힘이 있고/그 책을 사서 조금 읽었을 때 나는/허름한 옷을 영원히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낡음'이 긍정의 뉘앙스라면 그것은 그 낡음(의 대상 혹은 관계)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상 니트에는 보풀이 생기지 않으니까. 시인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것 혹은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하는 것(「예시와 호박」)은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신형철 평론가에 따르면)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나누는 일이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줄 수 있다. 생명은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시간이라는 형태로 분할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시집 『여름 외투』에 수록된 많은 시들은 꼭 샌드위치 같다. 시공간이 전혀 다른 개별 장면들이 시치미를 뚝 뗀 채 샌드위치처럼 포개져 있다. 이 시도 그러한 편인데 하나의 장면에서 화자는 지금 털모자와 털장갑의 보풀을 제거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주의'라는 단어와 관련된 장면들이 있다. '주의'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보풀을 제거하는 화자의 가위질 사이사이에 다양한 의미의 '주의'가 끼어든다. 그리하여 의아하게 느껴지는 시의 마지막 구절까지. ("시간의 보풀을 제거하고/이 잘 만든 장갑을 계속 쓸 거다/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보통 잊어버리는 건 기억이고 잃어버리는 게 장갑이다. 왜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가 아니고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쓴 걸까. 시간의 보풀 속에서 화자가 잊어버렸던 것은 무엇인지? (허름한 옷을 영원히 입고 싶었다는 마음인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생태주의로 시작한 이 시는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주의(다짐)으로 끝난다.

덧)경험주의적으로 말하자면 니트류의 보풀을 가위로 제거하는 건 진짜로 재밌다. 매년 털장갑의 보풀을 제거하는데 제거할 보풀이 좀 더 많았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하니까.(잠시 후 가족들에게 외치는 소리. "보풀 난 니트 공짜로 제거해드립니다!")

ㅡ슬픔과 기쁨의 개 인사

시의 화자와 비슷한 착각을 나도 하였다. 시집 『여름 외투』에 수록된 「포도」라는 시. 읽자마자 나는 당연히 제목에서 말하는 포도가 보라색 여름 과일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아니었고. 그런데 이 착각은 시인의 의도가 아니었을지. 포도라는 제목 옆에 독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런 투명 표지판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착각(혹은 오독)의 길로 가시오")

"누가 누구와 친해지느냐에 따라서/그 사람의 시가 달라진다면"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독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읽는 사람이 누구와 친하느냐에 따라 시의 독해가 달라진다는 것. 개와 친한 사람은 개인사를 개 인사로 읽게 된다는 것. 시인은 "시의 제목을 오독한 후 그 시가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작가의 의도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해석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겠지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필요 없어질 것이다. 문학은 어긋남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일 테니까.(나는 사랑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오독을 한 후 작품을 더 좋아하게 되는 그런 독서가 분명 작품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 믿는다.

덧)이것은 독자인 내가 누구와 친하느냐에서 비롯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시에서 커다란 슬픔을 보았다. 슬픔은 다른 단어와 문장들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제목을 포함한 이 시의 제일 첫 단어는 '슬픔'이다. 이 시는 4부에 나오는 「연면」이라는 시와 같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나도 그렇다.(윌리엄 트레버의 단편 「하루」에는 무지막지하게 사로잡힌 인물이 나온다) 시의 화자처럼 그리고 나처럼 비슷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곤도 구미코의 말없는 그림책 『슬픔의 모험』을 추천하고 싶다.

ㅡ소리 줌인

"오리가 꽥꽥거리고"

"아까 지나갔다가 다시 마주친 말티즈가/오리 소리를 들으려는 듯/멈춰 섰다"

이렇게나 슬픈 장면이 다행인 것은 나에게도 오리가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리 소리는 내가 시집 『여름 외투』에서 들은 첫 번째 소리였다. 꽥꽥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 닿았고 나는 귀기울였고 시집에서는 점점 더 많은 소리들이(들리지 않는 빗소리까지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너무 목소리가 작아"라고 말하는 시인이라면 장르를 잘 고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을 포함한 모든 카테고리의 책 중에서 시가 가장 고요한 장소니까. 시에서는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고, 꽃이 지는 소리도 들리니까. 그리고 분명 시에서 들리는 그 어떤 작은 소리라도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으니까.

덧)어쩐지 함께 읽고 싶어지는 책(아키코 부시,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에서 몇 구절 인용(또는 재인용)한다.

"뭔가 보이지 않을수록 주변에 있다는 게 확실하다."
조지프 브로드스키
"데이비드 미첼이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권력, 시간, 중력, 사랑. 정말 강력한 힘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다."고 쓴 대로다."(그리고 아마 상상력도)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가 "시는 보이지 않는 사제"라고 말한 것처럼 시야말로 보이지 않는 상태와 가장 잘 맞는 매체일 것이다."

ㅡ타이레놀에 대한 어떤 연구

눈 앞의 조명을 바라보며 카페 2층에 앉아있는 화자는 아마도 타이레놀을 먹었을 것이다. 시에서 직접 말해주지는 않지만. 부츠코를 나도 모르게 까딱까닥하고 있는 까닭을 여럿 늘어놓고 있지만 아까 먹은 타이레놀도 한몫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타이레놀은 마음 통증에 조금 효과가 있는 것인지.

눈앞에 있는 동그란, 하지만 완전히 동그랗지는 않은 조명을 응시하며 조명을 묘사하던 중

"내 앞에 놓인
등"

이라는 말이 쿵ㅡ하고 떨어졌을 때 지금껏 화자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카페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등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혹시 이건 돌아선 누군가의 등인 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왜냐하면 조명은 상처가 나 도려낸 사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이 상처는 사과의 상처인지 조명의 상처인지 아니면 바라보고 있는 이의 상처인지. 왜냐하면 타이레놀은 사과가 먹은 게 아니고 조명이 먹은 게 아니고 이 모든 여러 개의 그림자("조명 아래 조명의 그림자가/커다랗게 두 개/그리고 작지만 진한 그림자가 두 개/더 진한 그림자가 하나 있는 것을 본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먹었을 것이므로.

ㅡ증폭
"오래도록 좋아해온 향에 대해 더 깊이
모르게 되었다"

사실 시 전문의 맥락에서 뚝 떼어내 이 시구만 가져온다면 분명 깊이 좋아하게 될 것만 같은 문장. 하지만 시의 맥락 안에서 읽는 마지막 문장은 말도 못하게 슬프다. 착각이 증폭되고 알지 못함이 증폭되고 슬픔이 증폭된다.("어제처럼 가까우면서도/어제처럼 아득한"「가게 보기」) 내가 오래도록 좋아해온 너무도 익숙한 아카시아꽃의 향은 사실 이름부터 틀려먹었고, 나는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알고 있기는 했던 걸까. 미세한 차이라는 건 어쩌면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것이었는지도.(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에 그런 게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크레바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리하여 안다고 생각하던 나의 모름은 까마득하게 증폭되었다.

덧)1.이 시의 제목인 '증폭'이라는 단어를 앞선 시 「소리 줌인」에서 최선을 다해 꽥꽥거리는 오리에게 건네주면 좋을텐데.

2. 그런데 혹시 시집 『여름 외투』에 '어제'라는 단어가 열세 번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지.

ㅡ예시와 호박

시집의 맨 뒤 이소연 시인의 발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어쩌면 우정이란 일부러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일이 아닐까?"(그리고 나는 시집 『여름 외투』를 읽으며 시 역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시의 제목에 (개인적으로) 부제를 붙여본다면 '잃어버린 시간의 연속성을 찾아서-시간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리기에 대하여'정도로 하고 싶다. 시에 나오는 장면들(시간의 연속성을 온전히 경험하는 장면이든 아니면 시간의 불연속성을 깨닫지 못하면서 경험하는 장면이든 (시간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눈 뜨고 시간 베이는 장면이든)은 대체로 다 사랑스럽다. 시 속에서 시간이 엿가락처럼,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서처럼 몽롱하게 늘어난다. 물론 누군가(어쩌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 속 시간 도둑)의 으슥한 손에 들려있는 가위가 엿가락을 싹둑 잘라버리는 순간도 있다.("인스타그램을 잠깐만 하고/양팔을 어깨 위로 올려 스트레칭을 하면서")

언젠가 봄에 양귀비 꽃을 집에 들인 나는 초록색 통통한 붓 같은 양귀비 꽃봉오리가 붓 끝자락에서 빨간색(또는 노란색 또는 주황색 또는ㅡ) 혀를 빼꼼 내밀다가 점점 갑갑한 초록색 외투를 벗어내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커ㅡ다란 기지개를 켜며 (톡ㅡ 초록 외투가 땅에 떨어진다) 활짝 피어나는(꽃이 피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 모습을 관찰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니고. 꽃봉오리 상태로 들여온 양귀비들이 분명 잠들기 전 확인했을 때는 초록색 붓이었는데 밤새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확인해 보면 아름다운 색을 뽐내며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꽃으로 바뀌어 있는 게 신기해서(그리고 왠지 억울해서, 왜 나만 못 봐!!!) 시간을 들이기로 결심한 거다.(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그 고요한 봄날에 나는 양귀비꽃과 함께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나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 식물은 결코 정적(靜的)이지 않다는 것을. 다만 인간보다 훨씬 더 깊은 시간을 경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시에도 있다. 호박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험. 책과 (언제까지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험. 나이 많은(하지만 영원히 아가이기도 한) 개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험.

덧)1. 이 시에 나오는 시간(의 연속성)은 메리 루플의 「반려동물과 시계」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2. 덕분에 알고리즘이라는 단어가 수학자 이름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시는 시간의 연속성만 경험하게 해주는 게 아니다. 시는 지식도 준다.

"알고리즘(algorithm)이란 용어는 수학자이자 바그다드 왕립 의회 의원이었던 Mohammed Al Khwarizmi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일련의 순서화된 절차로, 다음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ㅡ어제보다 7도 높아요

시에는 7이라는 숫자가 반복된다.(근데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우연인 것인지 아니면 행운의 숫자이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시에서 경험하는 난생 처음 겪는 추위는 불행인지 아님 다행인지) 난로 위에 올라간 귤 일곱개. 시의 이 부분에서는 귤 냄새가 확 퍼지는 것 같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것 같은 추운 날씨 때문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시이지만 사실 이 시에는 그 어느 겨울보다도 많은 온기가 느껴진다. 시의 입구에서부터 난로가 준비되어 있고. 이 작은 난로 하나에 바싹 다가와 따닥따닥 붙어 있는 어른 셋(사람이라는 온기). 난로 위에는 나눠 먹으려고(마음이라는 온기) 누군가 가져온(부스럭부스럭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낸)태양 빛깔의 노란 귤이 하나도 아니고 7개,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터지는 웃음. 어제보다 7도 높아요, 라는 말 그대로 어제보다 7도나 따뜻한 문장(문장이 핫팩처럼 따끈따끈하다). 날이 너무 추워 입 안에서 출발한 문장은 당신에게로 건너가는 동안 조금씩 얼어붙는다 일곱빛깔 무지개 모양으로. 그렇게 시는 무채색의 차가운 겨울 풍경에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의 색을 아름답게 풀어놓으며 마무리된다.

ㅡ초여름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데? 초여름에 수박을 먹는다고? 하다가 생각해본다. 혹시 길지 않은 이 시에 초여름에서 한여름(맴맴ㅡ창밖으로 매미 소리가 들린다)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곱게 접혀 있는 것은 아닌지. 세 장의 편지를 꽉꽉 채워 쓰기까지, 누군가에게 재잘재잘 실컷 말을 걸기까지, 그리고 문득 편지를 안 줘야지, 라는 놀라운 생각을 생각해내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닌지(먹다 남은 수박을 다시 꺼내 먹으며 생각해보는 것이다).

ㅡ연면
시의 제목을 오독한 후 그 시가 더 좋아졌다고 말하는 시인처럼 나는 이 시의 제목을 오독한다 그리고 더 깊이 슬퍼한다. 내 눈에 이 시의 제목은 '연명'이라는 단어의 'ㅇ'자에 눈물방울이 떨어져 'ㅇ'자가 'ㄴ'자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시의 모든 문장들 위로 두두두둑ㅡ눈물방울이 떨어진다.

ㅡ중간고사
"제자리에 없는 책과"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구간 서고"에서 제자리에 없는 책을 찾느라 이리저리 서가를 옮기는 사서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 안쪽, 깊은 우물과도 같은 곳에 있는 서가를 상상한다.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는 서가. 그곳의 사서는 아마도 시인일 것이다. 내가 찾는 시는 (그게 무엇이든) 결코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고.

하지만 제자리라는 게 도대체 뭐지?

시에게는 어쩌면 제자리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늘 제자리에 없고, 책 읽는 사람 역시 언제나 제자리에 없다. 방문 바깥에 걸린 팻말에는 <행방불명중>("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이바라기 노리코, 「행방불명의 시간」)

"애한테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이 문장은 몽테뉴가 한 말이 아니라 탑 밑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는 가족들이 한 말이었다."(엘렌 식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마음이라는 깊은 우물 속 서가의 사서가 된 시인은 시가 쉽게 찾아지지 않기를 바란다.("쉽게 찾아지지 않았으면 해/너무 쉽게는 말고/좀 어렵게 찾아졌으면 해") 그렇게 쉽게 찾아지지 않는 시(그러니까 책)를 찾아 미로 같은 서가를 돌아다닌다. 미끄러지고 후ㅡ먼지를 털어내고 발을 헛디디고 "아무리 가는 틈 사이도 빠져나갈 수 있"(「개별 토끼」)는 토끼처럼 자꾸만 사라지는 시를 찾아 "둔중한 오후"를 밀어낸다. 요즘 도서관에는 상호대차라는 서비스가 있다. 집 근처 도서관에 읽고 싶은 책이 없을 때 좀 더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를 신청하면 다음날이나 늦어도 다다음날 짜잔-하고 문자가 온다. 집 근처 도서관에 상호대차한 책이 도착하였으니 버선발로 달려오라고. 그러면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책날개를 달고) 쌩ㅡ날아가며 생각한다. 내가 상호대차한 이 책은 누가 배달하는 거지? 혹시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 사서가 책상 어딘가에 붙어 있는 지잉ㅡ버튼을 누르면 생각지도 못한 비밀스런 통로, 아주아주 기다란 통로의 문이 열리고, 사서가 통로 안에 우아하게 책을 밀어넣은 후 다시 버튼을 누르면 슈우웅ㅡ 우리집 근처 도서관에도 있는 비밀스러운 통로를 통해 책이 도착하는 것은 아닌지. "'딴 게 나타났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찾아온 게 맞을 것이다. 시의 나라에 시인의 나라에 행방불명의 나라에(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시인이 떨어뜨린 여권은 가지고 오셨는지). 이 나라에는 제자리라는 게 없어서 그게 무엇이든 찾으려면 시간을 들여 헤매야 하지만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문득 고래 뱃속에 도착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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