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와 혁명」을 읽고 끄적임)"나도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언젠가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태수 씨는 요양병원 꼭대기 층에 있는, 정원이라고 불리는 정원 아닌 곳을 좋아했다."태수 씨가 좋아하는 요양병원 옥상에는 정원이라 불리지만 정원은 아닌 곳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족욕이라 불리지만 족욕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족욕을 하며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다 태수 씨에게 이런 말을 하지. "나도 태수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이에 앞서 나와 태수 씨가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병원 복도를 산책할 때에 병원의 모양은 양쪽이 정확한 대칭 구조인 데칼코마니."나는 태수 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 복도를 빙글빙글 돌았다. 병원은 꼭 두 손바닥을 반듯이 펼쳐놓은 것처럼 정확한 대칭 구조였다. 양 복도 끝쪽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고 그 중심에는 각각 디귿 자 형태의 데스크가 있어 간호사들이 상주했다. 태수 씨와 나는 데칼코마니 같은 그 병원 복도를 밤새도록 돌았다."작품 속 '나'가 생각하기에 나의 삶은 미지근하기 그지 없다. 나에게는 물론 뜻이 있지만 그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느껴지고. 오랫동안 미지근한 삶에 푹 담가둔 '내' 발은 그저 퉁퉁 불어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되고 싶어한 태수 씨의 삶은 어떨까. 노동과 투쟁과 혁명. '내'가 보기에 진짜 삶인 것 같은 근사한 것들을 도모하는 삶. 하지만 제목에서 밝혀진 것처럼 혁명은 태수 씨의 삶에서 밀리고 밀리고 밀려나 그 개(유자)의 뒷자리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럴 때, 혁명이라는 단어의 미지근함. 결국 나의 삶과 태수 씨의 삶은 미지근한 물감으로 찍어낸 데칼코마니처럼 조금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닮고 싶은 태수 씨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었을까.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나는 태수 씨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화자가 해주는 이야기만으로 태수 씨가 진짜 훼방을 놓는 사람이었는지 알아채기는 어렵다. 화자가 그런 사람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할 뿐. 오히려 훼방을 놓는 일화는 화자의 어머니에게서 얼핏 보여지고(태수 씨의 세탁소 페친과 술을 먹는 일화) 화자에게서도 얼핏 보여진다.(이전 회사에서 운영 팀과 회식을 할 때 고삼녀라는 단어를 두고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일화). 게다가 미지근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장면은 화자가 또는 등장인물이 어떤 그늘에서(어떤 지령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나는 수첩을 꺼내지 않고 차장님에게 말했다. 차장님, 평생 차장님으로 남아주시면 안 돼요?"아버지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계속해서 수첩에 적힌 말로 아버지를 흉내내던 '나'는 작품에서 딱 한 번 수첩을 보지 않고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혹은 이런 장면,"수진은 처음에는 나보다도 많이 울었지만, 곧 누구보다도 먼저 태수 씨의 병에 적응하고 이런저런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그랬다. 나와 엄마는 수진의 지시대로 태수 씨를 간병했고"동생 수진은 아버지의 장례 프로젝트 핵심 인물이고, 이 낯선 상황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하는 인물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일을 진행하고 나와 엄마는 동생 수진의 지시를 따라 아버지를 간병한다. 화자가 핵심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에 비해 수진은 작품에서 핵심 인물의 지위를 얻지 못하며 성식이 형보다도 더 적은 분량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독자로서는 좀 아쉬웠다고 말해야 할까 혹은 의아했다고)어릴 적 상상했던 아버지의 혁명(이라는 단어)은 근사했지만 결국 아버지 삶의 가장 근사한 혁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개"로 인해 이루어진다. 거창하기만 한 혁명이라는 단어는 그보다 작은 줄 알았던 삶이라는 단어에 휘둘리다 점점 졸아들었지만....이 작품 자체도 혁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점점 졸아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화자의 삶은 한 번도 뜨거웠던 적 없이 내내 미지근했다지만 그 미지근한 물에서 독자 역시 건져올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화자는 아버지가 병에 걸리고 난 후에야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화자는 내내 아빠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빠를 닮고 싶다고 생각할 리가. 그리고 어쩌면 그게 문제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미움 안에서 깨달은 미미한 사랑이 아니라 내내 존재하던 미움과 역시 데칼코마니처럼 쌍으로 존재하던 사랑. 그 때문에 작품은 미지근할 수밖에 없던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