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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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한국 소설가 중 나의 최애 작가님. 작가님의 작품을 다 읽어보겠다는 혼자만의 미션도 가지고 있다. [문학동네 북클럽] 셀렉도서로 이 책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차례
각 챕터 제목을 두 글자 단어로 세 개씩 배열했다. (음악의 3도 화음이 생각나기도..) 작가님은 등장인물들의 삶이 패턴처럼 펼쳐지는 것을 독자가 차례만 보고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 챕터만 두 글자 단어가 아닌데, 그것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패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일어나는 부분이기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참 치밀하게 짜여진 소설이다.



#그믐
이 소설을 구상하기 전부터 ‘그믐’의 어감(또는 슬픔의 이미지 등)이 좋아서 자신의 작품에 한번 사용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정재승 박사님의 <열두 발자국>도 그렇게 붙여졌다고 함) 그믐달은 새벽에 떠서 해가 뜨기 전까지 잠깐만 볼 수 있는데,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지 사실은 하루종일 떠 있는 존재다. 그런 그믐의 특성을 그대로 차용했다. (‘차례’와 ‘그믐’에 대한 작가 의견은 <최영아의 책하고 놀자 - (2015년 9월 5일 방송분)>에서 참고)
내가 느낀 ‘그믐’의 이미지는 두 가지다. 1)보이진 않지만 정해진 운명(시간)을 의미하는 것과 2)주인공들간의 숨겨진 마음 또는 선악구도의 흐릿함(혼재된 선악 관계)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부제목인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그런 점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옳고/그름, 좋고/싫음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뒤섞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스토리 전개가 뒤죽박죽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내용 이해가 잘 되는 건 놀랍다) 시간의 뒤섞임이 드러나는 형식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1) 실수로 <우주 알 이야기>원고가 섞이는 것
2) 이 작품의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 진행되는 것
3) 남자 주인공이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 - 전지적 시점
이 세 가지가 잘 어우러져 있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이 <우주 알 이야기>라는 응모작 원고를 바닥에 흘리는 바람에 그 작품의 순서가 뒤죽박죽 섞이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 이후로는 내가 마치 <그믐>을 읽는 건지 아니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우주 알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 전체가 참 교묘하고 섬세했다.



#시간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시간 순서대로가 아닌 시간의 앞뒤가 없는 세상. 영화 <인터스텔라>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 소설 속엔 ‘인터스텔라’, ‘우주 알’, ‘그믐’과 같은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와 이를 영화화 한 <컨택트>가 많이 떠올랐다. <컨택트>의 언어학자 루이스가 외계인 햅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게 되면서 정해진 운명을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믐>의 남주가 그런 상태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정해져 있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용서를 바랄 수 있을까? 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헤어질 사람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결국 죽겠지만 그 죽음을 앞당길 용기가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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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8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 폭력, 운명
이 소설을 시간 순서대로 바로 잡아보면 어떤 사건을 향해 나아가는 전개가 아니라 그 사건 이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학교폭력이 있었고, 살인이 일어났고, 수 년이 지나 살인자는 형을 다 살고 나온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조용히 살고자 한다. 그 와중에 학창시절 좋아했던 여자와 재회하고, 자신을 따라다니는 죽은 아이의 엄마까지 다시 만나게 된다. 슬프게도 살인자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 여기서 폭력은 시간을 달리하면 다르게 느껴진다.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읽으면 읽을수록 계속 그 자리를 바꾸게 된다. 마지막엔 결국 각각의 폭력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살인자도, 죽은 아이도, 그 아이의 엄마도, 여자 주인공도 모두 그들이 악이 되는 지점엔 이유가 있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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