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변명 -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의 불편한 진실
베터니 휴즈 지음, 강경이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대 민주정이 탄생한 아테네와 자유인 소크라테스를 탐구한 책.



#만남
예전에 유시민 작가님의 추천으로 사 놓았던 책이다. 강연회 말미에 한 질문자가 책 추천을 부탁드렸고 그때 말씀한 책이다. 당시에 제목만 들어도 어려울 것 같았던 청중들은 좀 더 쉬운 책을 원했지만,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도 책 두께에 겁을 먹고 묵혀두었다가 최근에야 읽었다. 읽고 난 지금, 작가님께서 왜 어렵지 않다고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사상적 사유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인물들이 나오고 사건이 발생하고 그 결과로 마음이 변하는 소설에 가까운 책이다. 저자의 섬세한 구성과 문장 실력이 한몫하는 것 같다.



#아테네의 변명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둘러보는 여행서라고도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아테네의 변명>은 외부적인 요인들(아테네의 성장, 정치 상황, 민주주의의 탄생, 신분, 주변국과의 갈등, 전쟁, 돈과 상업, 주변 인물들)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어떤 환경에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좇아갈 수 있는 책이다. 제목도 센스 있는 것 같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를 둘러보면서 기원후 21세기의 우리들을 생각해본다.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인을 배척하고 하나의 이념만을 옳다고 믿으며 강한 자의 논리와 제국주의적인 경제정치는 관용을 잃어버린 현재와 다를 바 없었다.



#무지의 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무지의 지‘라고도 불리는 이 말은 많은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도 있을 것이다. 동양권에서는 ‘겸손함‘으로 풀이되겠지만 나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겸손은 나를 낮추는 행위가 수반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지는 외부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물음을 찾아가는 것이기에 비판적인 태도가 따라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소크라테스가 불편한 사람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동서양의 차이 중 하나인 것이다. 현대를 지배한 서구 문명 사상가인 소크라테스와 그 생각을 연구한 서양인들을 이해하는 관점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주변인물들
외국인이자 여성인 ‘아스파시아‘는 당대의 일류 시민(아테네인+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유일한 여성 화자로 등장한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아테네에서 외국인 여성이 받아들여야 했던 지루한 옷감짜기나 매춘의 운명을 거스르고, 아테네 장군이자 정치가인 페리클레스의 첩이 되어 승승장구한다. (페리클레스는 아내와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인들은 그녀를 계속적으로 비난하며 유언비어를 퍼트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페리클레스의 연인이 되기 전부터) 그녀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지혜를 나누는 것에 있어서 ‘외국인‘, ‘성별‘,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 알키비아데스는 참 독특한 인물이다. 민주정 아테네의 모습처럼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등장해서 나중엔 아테네처럼 추잡하게 몰락한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는 애정의 관계처럼 보인다. 동성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크라테스는 매혹적인 그를 밀어내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사랑에 대해 탐구했을 것 같다. 화려함과 매력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만 그 끝도 아름다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흔들린 마음에 쉽게 쓰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된 사유가 필요하다.



#성장
유시민 작가님의 <청춘의 독서>에서 봤던 ‘생물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은 물질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요소에도 해당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어느 날 나의 무지함을 자각하려 노력했었고 그나마 성장의 시작이었다. 내 삶에서 단계의 장벽, 분야의 장벽으로 도달하지 못한 ‘모르는 것‘을 느끼며 성장의 한 걸음을 내딛고자 노력했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 나에겐 인상적이다. 그 이후 끊임없이 질문하는 그의 태도는 내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아테네 속 소크라테스는 시작일지 모른다. 아직도 많은 가야할 길이 있기에 오늘도 사유한다.


(P23)

단지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오래도록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은 엘리자베스 1세에서 마틴 루서 킹,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21세기 미국에 이르기까지 사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근간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인본주의자들의 전당에도 가득하다. 11세기 유대 철학자 예후다 하 레비는 유대교의 본질을 놓고 하자르의 왕과 대화를 나눌 때 소크라테스를 인용했다. 존 로크와 토머스 홉스의 정치론 곳곳에도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전히 그를 중요하게 여겨야 할까? 왜 오래전에 살았던 이 철학자를 기억해야 할까?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고 충고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자기 자신과 화해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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