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이팅 클럽 ㅣ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리뷰
글쓰기로 이어지는 구질구질한 인생
이야기는 서울시 종로구 계동의 아주 작은, 5평이 될까 말까 한 글짓기 교실에서 시작한다. 작은 글짓기 교실을 운영하는 가난한 김 작가과 그의 딸 영인. 또래보다 키와 체구가 큰 매력 없는 여자애. . 열일곱 영인은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스피노자나 니체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리버럴한 척, 온갖 남자 경험을 다 한 여자애처럼 굴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를 들고 다니며 서른 살이 되면 자살할 거라고 떠들었지만 "나는 살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이다.", "새로운 언어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다."와 같이 난해한 문장으로 가득한 『삼십 세』를 골치 아픈 것으로 여기던 문학허세쟁이였다.
평생을 작가 지망생으로 산 김 작가는 글짓기 교실에서 글쓰기를 가르친다. 글짓기 교실을 연 지 두달이나 되서야 조금씩 모여들던 아이들의 받아쓰기며 글짓기 숙제를 도와주는 김 작가를 따라 영인은 아이들 화장실 데려다주기, 코 닦아주기, 흘리고 간 물건 챙기기 같은 일을 하였다. 사실 진짜 작가도 아니었던 김 작가를 다들 호칭없이 대충 부르거나 영인 엄마라고 불렀지만, 문학과 글쓰기를 꿈꿨던 사람들은 그녀를 꼬박꼬박 '김 작가'라고 불렀다. 그렇게 소소하게 글짓기 교실을 운영하던 김 작가는 어느 문학잡지에 공모하여 신인상을 탔다. 하지만 여전히 작가 지망생이었다.
글짓기 교실에는 아이들의 수업이 끝난 오후부터는 동네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여자들의 글쓰기는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학교 다니다가 키가 크다고 왕따당한 얘기,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다른 여자네 집으로 간 얘기, 언니와 낯선 지방에 있는 친척집에 심부름을 다녀온 얘기' 등 지루하고 평범한 라이프 스토리가 다였다. 그렇게 글을 끄적이다 결국은 남편 얘기, 시댁 얘기, 자식 얘기로 한탄을 하다 돌아갔다. 여자들은 글을 쓴 종이 쪼가리들을 글짓기 교실에 남기고 갔다. 영인은 그것들을 쓰레기라 불렀다. 여자들의 인생이 담긴 글을 영인은 쓰레기라 여겼다.
" 그런데 쓰레기들은 계속해서 조금씩 더 늘어 갔다. 시간이 가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가 끝나고 현재의 시점까지 와있었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 이르자 모두들 자기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자식과 남편 얘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김 작가는 그런 노트들 끝에다가 "자기 이야기, 자기 이야기를 쓰세요!"라는 코멘트를 줄줄이 적어 놓기 일쑤였다." - p.187
김 작가는 그녀들의 글에 "자기 이야기, 자기 이야기를 쓰세요!"라는 코멘트를 달고는 했다. 여자들은 이제 쓸 이야기가 없는데 뭘 쓰란 말이냐며 투덜거렸다. 김 작가는 집을 나오면서 본 풍경, 자신이 자신 있게 하는 요리 레시피라도 쓰라고 했다. 그렇게 여자들은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을 때까지 글을 썼다. 영인에게는 그저 "종이컵을 든 동네 아줌마들의 결연한 수다방"일 뿐인 글짓기 모임을 김 작가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이라고 불렀다. 김 작가에게 이 모임은 어떤 의미였을까? 김 작가에게 모임에 오늘 여자들에게 글 쓰기로써 자기 자신을 찾길 바랐던 것이다. 결국은 남편 얘기, 자식 얘기를 하게 되더라도 계속해서 여자들에게 모임은 자기 자신을 쓰며, 인생을 쓰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영인은 별 것도 안 하면서 돈을 받는다고, 모임을 돈 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는 김 작가를 아니꼽게 여겼지만 김 작가에게 모임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다.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고 또 갑자기 진지해졌다가 또 갑자기 음담패설로 빠지는 계동 여자들의 대화는 다이내믹함, 발랄함, 그리고 수준낮음 그 자체였다. 그 여자들은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씩씩했던 걸까. 지금도 궁금하다." - p. 170
그렇다면 영인이게 글 쓰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영인의 글 쓰기는 편지쓰기로부터 시작한다. 영인이 처음으로 빠진 여자 R에게 한 달 동안 쓴 장문의 편지, 첫 여자친구 K와 주고 받은 편지, 저녁마다 글짓기 교실에 혼자 찾아오던 남성에게 전하고 만 스무 장의 편지. 영인은 타인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볼품없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 온 나 스스로를 괜찮은 존재로 재인식하게" 되었다.
어느날 영인은 인생 두 번째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영인을 쓰게 만든 건 배고픔과 분노였다. '김 작가가 연애에 미쳐 가정경제를 돌보지 않고 생활을 등한시한 탓에 쌀을 살 돈이 없다는 게 배고픔의 이유였고, 스무 장이나 되는 연애편지를 보냈지만 철저히 무시를 당한 게 분노의 이유'였다. 배고픔과 분노로 시작한 소설은 어느새 원고지 70매의 단편소설이 된다. 영인은 자신의 말도 안되는 소설을 봉투에 챙겨넣어 늘 동네 카페에 앉아 있는 작가 J를 찾아간다. 작가 J와의 만남으로 영인은 세상을 달리보는 방법을 배운다. J작가는 영인의 소설을 보고 "설명을 하려 들지 말고 묘사를 하라."고 한다. 다음 날부터 영인은 미친 사람처럼 길거리를 싸돌아다녔다. J작가가 말한 것처럼 설명이 아닌 묘사를 하기 위해 계동 구석 구석을 살폈지만 돌아오는 건 구질 구질한 인생들 뿐이었다.
김 작가의 글쓰기 교실과 글쓰기를 사랑하던 계동 여성들의 모임을 무시하던 영인은 서른 살을 기점으로 변화를 맞는다. 한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가 일을 하던 영인은 어느날 스스로 글쓰기 모임을 열기로 다짐한다. 길거리에서 직접 만든 글쓰기 모임 전단지를 돌린다. 김 작가의 글쓰기 교실을 구질 구질하고 더러운 사람들이 모여 쓰레기 같은 글을 쓴다고 여겼던 영인이 또 다시 글쓰기 교실을 열었다라.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라고 생각했지만, 영인은 아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터득했을 것이다. 모여서 글을 쓰고 나누는 것이 가진 힘을.
" 아, 네, 저는, 저기, 셀리 네일 숍에서 일하는, 오늘 너무 감사드려요. 저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아니, 중교등학교 시절에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쓰는 것보다 읽는 게 더 좋아요. 아무튼 많이 가르쳐 주세요." - P.274
반 충동적으로 글쓰기 모임을 열고는 사람들이 모이자 영인은 화장실에 숨어 덜덜 떤다. 네일숍에서 같이 일하던 N에게 떠밀려 나와 사람들 앞에선 영인이 한 말은 "아무튼 많이 가르쳐 주세요." 자기가 모아놓고는 아무튼 많이 가르쳐달라니. 긴장에 잘못 나온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많이 가르쳐달라는 영인의 말은 그간 계동의 글쓰기 교실에서 느낀 것을 함축한다. 글 쓰기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라는 것. 글쓰기 행위를 통한 상호작용은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영인에게 글 쓰기는 그런 것이었다.
"한번 써 봐. 인생이 얼마나 깊어지는데." - P.225
"그러나 왠지 일거수일투족이 다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내가 느끼는 걸 표현하지 않으면 중요한 걸 다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움직임도 기록해두어야 할 것 같고 그 순간 만큼은 충만한 감정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 P.255
N이 종일 글만 쓰는 영인을 놀린다. 영인은 대답한다. "한번 써봐. 인생이 얼마나 깊어지는데." 인생이 깊어진다. 글쓰기는 깊어짐이다. 이 한문장보다 글쓰기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