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제본지원도서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눈앞의 세상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살아가야 했다. 황정은의 『작은 일기』는 그런 "살아냄"의 과정을 담아낸 기록이다. 가장 개인적인 글쓰기 방식인 '일기'를 통해, 이 책은 우리 모두가 함께 겪은 시대의 아픔을 조용하지만 뚜렷하게 불러낸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던 시간. 그리고 그 뒤에도 계속된 모욕감, 무기력, 절망,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작은 일기』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황정은의 글은 언제나처럼 절제되어 있지만, 그 속의 감정은 날것 그대로 거칠다. 마치 살갗을 벗겨낸 자리에 아직 멈추지 않은 피가 흐르는 것처럼 생생하다.
우리는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뎌냈다. 나도, 내 아이도, 거리에서, 광장에서, 군대에서, 집 안에서. 하지만 쉽게 꺼내 말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말문이 막힌 그 시간, 작가는 묵묵히 일기를 썼다.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주어진 몫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말할 수 없어서 썼다"라고, “울 수 없어서 기록했다"라고 고백한다.
이 책 앞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시간인 것처럼 몸이 반응한다. 나도 그 밤을 함께 보냈고, 나도 추웠고, 나도 누군가의 무사함을 빌며 마음을 졸였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심장이 조여오고 손끝이 저릿하다. 나 역시, 어제의 충격이 오늘의 익숙함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악한 면 때문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결국 다정함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길 위에서 누군가가 건네준 초콜릿 한 개, 미리 계산된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서로를 알아보고 이어주는, 우리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슬픔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잠기지 않고, 무기력해지지 않으려는 마음. 세상의 불합리함에 분노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계를 사랑하려는 의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잊고 지낸 내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책장을 덮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이 안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까? 작가는 말한다. “나는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라고. 그 말은, 우리가 다시 빛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끝까지 붙잡아야 할 마지막 감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