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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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서포터즈3기 출판사지원도서입니다.


영화가 태어나는 순간, 사람의 진심이 깃든 곳에서


살면서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 단순히 그것이 재미있거나 감동적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영화는 어떤 순간엔 나 대신 울어주고, 어떤 순간엔 나보다 먼저 질문을 던져준다. 특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그런 면에서 내게 특별했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늘 작고 보잘것없는 삶을 품에 안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진실과 구원을 담담히 응시해왔다.


이번에 읽은 책,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는 그가 프랑스 배우들과 함께한 첫 해외 프로젝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제작 과정을 담은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영화 제작 일지를 넘어서, 한 인간이 어떻게 진심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과 함께 창작하며, 자기 삶과 창작의 윤리적 의미를 되묻는지를 보여주는 자전적 고백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난 후 내 머릿속에 오래 남은 문장이 있다. “진실은 재미없지 않겠어?” 이 대사는 영화 속에서 노배우 파비안느가 딸에게 자서전의 왜곡을 지적받고 대꾸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연기와 삶의 경계를 오가며 살아온 배우이자 인간 파비안느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장은, 감독 고레에다가 던지는 하나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감독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내가 만드는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진실은 어떤 모습인가?"


고레에다는 책 곳곳에서 '감독의 권력'에 대해 언급한다. 그의 영화가 늘 타인을 다루는 만큼, 그 타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 그는 끊임없이 되묻는다. 배우에게 어떤 연기를 요구할 때, 어떤 이야기를 그들의 삶에 투영해낼 때, 창작자는 무언가를 구제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의식한다. 그리고 이 윤리적 고민은 영화적 테크닉이나 스타일보다 훨씬 중요하게 이 책을 관통한다.


그는 언제나 “섬세하고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내가 특히 감탄한 대목은, 촬영지로 사용될 집에 머물며 대사의 길이를 공간감에 맞춰 조정하고, 배우의 해석을 듣고 장면을 수정하는 그 집요한 섬세함이다. ‘감독’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협업자로서 영화라는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그의 태도는 지금 이 시대의 모든 리더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보인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여성의 나이 듦', 그 중에서도 '대중 앞에서 늙어가는 여성 배우'의 고독과 자존심을 매우 깊이 있게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파비안느는 젊은 시절의 화려함에 안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만든 가면을 벗어내려는 시도를 한다. 물론 그녀의 방식은 정직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투명한 자기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녀의 오랜 외로움과 두려움을 엿보게 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지금의 유튜브 시대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과거 배우들을 ‘접근 불가능한 존재’로 여겼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그들이 냉장고 문을 열고 라면을 끓이는 일상까지 소화하는 콘텐츠 속에서 본다. 하지만 그 일상이 진짜 ‘진실’일까? 고레에다는 이 질문을 영화라는 방식으로 천천히, 그리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책을 읽으며 감독이 자신의 ‘고레에다다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는 부분에서 깊이 공감했다. 일본어를 벗어나고, 일본을 벗어나도 남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내 자리, 내 언어를 떠나도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그 물음이 고레에다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탄생시켰고,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나 역시 40대의 경계에서 나의 진실과 가식, 기억과 왜곡 사이를 들여다보게 된다. 엄마로서, 사회인으로서, 여자로서 살아온 내 삶은 ‘진실했는가’ 혹은 ‘진실할 수 있었는가’. 고레에다의 질문은 내게 그렇게 스며들었다.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는 자기 삶을 진심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창작일지이자 성찰의 기록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주는 ‘정중한 연출’의 태도는 사회 곳곳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어떤 감수성을 요구하고 있다.


나처럼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나서 꼭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다시 보기를 권한다. 어느 장면에서든, 배우의 눈물 너머로 고레에다의 따뜻한 눈길이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씩 진실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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