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35
헤르만 헤세 지음, 장혜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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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지원도서


“이제는 나를 껴안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에겐 《데미안》이 청춘의 방황을 노래한 명작일지 모른다. 그러나 삶의 중반을 지나며 이미 수많은 상처와 타협을 겪어온 나에게는, 한 인간의 내면 분열과 그 치유의 여정을 따라가며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묻고 답하게 만든 《황야의 이리》가 훨씬 더 사적이고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지성과 문화적 소양을 갖춘 중년의 남성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문명화된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모든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야생성을 품은 ‘황야의 이리’로서의 자아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라진다. 그의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며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필연적인 외로움이다.


딸로서, 엄마로서 혹은 ‘누군가의 누군가’로만 존재해온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은 끊임없이 많고 무겁지만, 정작 내 안에 도사린 진짜 나의 욕망과 본성, 자유는 좀처럼 드러나지 못한다. 하리가 겪는 내적 고통은 곧 내 고통처럼 느껴진다. 내가 억눌러온 야성과 본능, 그리고 외면했던 또 다른 자아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런 하리 앞에 나타난 헤르미네는 처음엔 수상하고 기이한 여자로 보이지만, 곧 그녀는 하리의 ‘내면의 목소리’, ‘그림자 자아’, 혹은 ‘아니마’로 읽힌다. 그녀가 하리에게 건넨 춤과 사랑, 그리고 마술극장은 단순한 쾌락의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과 경직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를 마주하는 인식의 장소다. 그곳에서 하리는 마침내 삶을 비극이 아닌 유머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이 대목은 내게 깊고, 오래 남는 울림을 주었다.


“삶을 유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낙관이 아닌 삶의 잔혹함과 무게를 충분히 견뎌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20대에 이 책을 읽었다면 그저 철학적이거나 모호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쯤을 지난 지금, 나는 하리가 웃음을 통해 죽음을 유예하고, 분열을 끌어안으며 걸어가는 그 걸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소설이 1960년대 히피 문화와 맞닿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다.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 성과 감각의 해방, 본능의 회복,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 이 모든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다. 나 또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내 감각을 배제하며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황야의 이리》는 단순히 분열된 인물의 심리를 그린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껴안아가는 과정을 그린 서사이며, 억눌린 자아가 제 모습을 찾아가는 내면의 여정이다. 책장을 덮으며, 나 또한 수많은 얼굴과 목소리를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은 이리이자 인간이고, 그 모두가 당신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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