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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가제본지원도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냄비가 까맣게 타들어간 아침, 손에 화상을 입고 무릎을 찧은 오후, 그리고 애나를 떠올리는 저녁. 하루의 감각들이 조용히 번져가며,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잔향이 조용히 마음 밑바닥에서 피어오른다.
『바움가트너』는 상실을 어떻게 간직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바움가트너는 10년 전, 사고로 아내를 잃고 깊은 고통 속에 휘청였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 담담함은 포기나 무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조용한 증거이자, 기억을 통해 그 사랑을 지속하고 있다는 작고도 단단한 증명이다.
상실은 바움가트너의 삶 전체에 걸쳐 ‘환지통’처럼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계속해서 느껴지는 고통처럼, 애나가 없는 삶은 이미 익숙해졌지만, 그 공허함은 여전히 그의 삶 어딘가에 살아 있다. 환지통은 완전히 낫는 법이 없기에, 그저 그 통증을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잔인할 만큼 사실적이면서도, 어딘가 위로가 된다.
책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상실이 반드시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움가트너는 비어트릭스라는 젊은 여성을 통해 다시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녀는 죽은 아내의 시를 연구하는 학자이자, 점차 딸처럼 느껴지는 존재로 그의 삶에 들어온다. 새로운 관계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진 못하지만, 조용히 그 자리에 머물며 삶의 무게를 함께 들어준다. 그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말하는 ‘연결됨’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연결은 사랑이든 우정이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바움가트너는 이 단순하면서도 근원적인 진실을 삶을 통해 체득한다. 그리고 그 연결은 단절되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와의 연결도, 지나간 시간과의 연결도 이야기를 통해 계속된다. 『바움가트너』는 결국 그런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자주 멈춰 선 건, 문장 때문이 아니라 그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흐름 때문이다. 생각은 과거를 징검다리 삼아 껑충껑충 건너가고, 몸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채 잠시 멈춰 선다. 바움가트너는 자신의 나이를 무겁게 느끼기보다,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무리하지 않고, 억지로 붙잡지 않으며, 담백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한다.
그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되 비관하지 않고, 상실을 인정하되 절망하지 않는다. 품을 건 품고, 버릴 건 버린다.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고, 기억하되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상상력의 힘을 발견한다.
폴 오스터는 이 짧고 조용한 마지막 소설에서, 이야기가 우리를 어떻게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며, 그 삶은 언제든 다시 반짝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은 언제나 누군가와의 ‘연결’ 속에서 태어난다.
기억이 건네주는 미세한 떨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어 붙여나가는 하루하루의 조각들. 언젠가 나도 바움가트너처럼 조용히 나이 들 수 있기를. 책과 글쓰기, 그리고 나를 기억해 줄 누군가와 함께라면, 삶은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폴 오스터, 안녕히. 당신의 마지막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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