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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평점 :

박노해라는 필명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이라는 뜻이다.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하고 금서 조치를 당했으나 100만 부 가까이 발간되었다. 1989년 사노맹을 결성하고 7년여의 수배생활과 7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나중에 국가보상금을 거부하고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라며 비영리 사회운동 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하고 2003년 이라크 전쟁터에 뛰어들면서 세계의 가난과 분쟁 현장에서 평화 활동을 계속하고 계신다. 글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 같으신 분!
찾았다. 내 침대 머리맡에 둘 단 한 권의 책을! 인덱스와 밑줄 칠 형광펜을 들고 읽기 시작했으나 둘 다 필요가 없는 책이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다 밑줄을 긋게 될 테니까! 423편의 글과 사진을 엄선해 묶었으니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다 좋은 글과 사진을 만날 수 있다.
처음에는 여백이 많아서 사진 사이즈가 좀 더 컸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매일 아침 펼쳐서 읽게 되는 페이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선생님과 대화하는 셈 치고 연필로 필담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기장 대신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함께 수록되어 있는 영어 문장들은 너무나도 깔끔하다. 박노해 선생님의 글과 사진을 외국인 친구에게 선물해도 좋겠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어른이 계신다고 자랑하면서.
굽이 돌아가는 길 / 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굽이 돌아가는 길’,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 수록 詩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박노해 선생님의 시다. 곧게 잘 자란 나무는 일찍 베어진다. 바람 부는 방향대로 돌이 있는 방향대로 맘껏 휘면서 자란 나무는 긴 시간을 더 즐겁게 자랄테니까. 고속도로는 목적지까지 빨리 데려다 주지만 자연을 감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국도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에 낭만이 있고 풍경의 아름다움 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삶을 살아가보자.
종로에 있는 라 카페 갤러리에서 박노해 <걷는 독서>展을 21년 12월 말일까지 무료로 개최한다고 한다. 선선한 가을에 천천히 걷는 마음으로 다녀와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