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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 ㅣ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평점 :

저자 아를레트 파르주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주로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이다.
파리 형사 사건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여성, 빈민, 대중 행동 등의 주제를 연구했다.
이 얇은 책에 정말 놀랐다.
21세기 정보화의 시대에 도서관에 처박혀서 자료 조사를 필사로 하고 있다고?
파르주의 글을 읽으면서 왠지 냉기가 나올 것만 같은 도서관의 분위기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책으로 묶여져 있는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방대하게 흩어져 있는 그야말로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서 헤엄치다가 걸리는 엽서나 메모지에 쓰여져 있는 정보들을 찾아서, 마치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수 많은 모래알이 펼쳐져 있는 태양 없는 사막 위를 걷는 여행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나라 중앙도서관 지하 문서고에도 저렇게 많은 자료들이 있을까?
급 궁금해진다.
형사 사건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어떻게 연구할 생각을 했을까?
과거의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을 때 그 경찰들은 그들은 직업이었기 때문에 작성된 그 조각들이 이렇게 미래에 사람들이 필사하면서까지 연구할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나의 기록이 훗날에 어떻게 사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리라.
역사가가 이런 아카이브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사건이 다 끝난 뒤에 어느 쪽이 근대적이고 어느쪽이 전근대적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지배층 지식의 길에서 벗어나,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행동 방식을 직접 개척해가는 사건 당사자들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지배층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사건 당사자들로부터 숨기고자 하는 사건의 의미를 쟁취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사건의 구체적 양상에 주목한다. 사건을 구축하는 동시에 해체하지만 사건의 형체를 무너뜨리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으며, 사건의 의미를 끊임없이 모색하지만 사건에 '역사가 자신'의 의미를 덧씌우지는 않는다.
아카이브는 역동하는 인문들, 작용과 반작용, 변신과 충돌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능동적 인물들을 엿보게 해준다.
아카이브에서 역사사가 할 일은 바로 그 역동을 포착하는 것,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들 안으로 파고 들어가 사회관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 추상적 범주에 집착하는 대신 그렇게 움직이고 시작되고 종결되면서 바귀어가는 것들을 규명해내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에 의해서 씌여졌다는 역사. 뒤집어서 생각해 봐야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