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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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 드라이브를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했어요. 즐기겠다고 결심만 하면, 대개 언제든지 그렇게 즐길 수가 있어요!" (p. 51)

여전히 로맨스 소설을 보고 가슴을 설레고, 어린 시절 혹했던 동화들을 보며 눈을 반짝인다. 그중 열중하면서, 오늘 분량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했던 만화가 있다. <빨강머리 앤>이다. 피터팬처럼, 모래요정 바람돌이처럼, 미래소년 코난처럼 내 어린 시절의 한 영역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만화. 끊임없이 조잘대는 앤의 이야기를 알아들으려 귀를 바짝 세우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말들의 향연 속에서 때론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설렘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앤 속에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끝도 없는 상상력이, 조수 간만의 차가 급격한 희비극이, 사람을 이해하는 아이들만의 통찰력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영옥 작가가 좋아하는 동화가 두 권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키다리 아저씨>이고 다른 하나가 <빨강머리 앤>이란다. 소설가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초등학교 때 시작해서, 작가로서의 길이 험난할 때 위로받았던 만화 역시 <빨강머리 앤>이었다고 말이다. 보는 것만으로 괴로운 일상이 살아질진대, 앤이 하는 말을 노트에 적으며 소설을 쓸 수 있었노라고. 그만큼 앤은 자신을 일으켜 세운 기적이었노라고 말이다.

'추억이 기억과 다르다면, 그런 것 때문이리라. 추억 속엔 '나'아닌 '너'도 있다. 추억은 '우리가 함게 만드는 것이다.' (p. 190)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3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여전히 실종 상태로 처리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 했다. 여파로 경제 침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한 고등학교의 거의 대부분의 학생을 잃은 사건. 대한민국 국민의 공분을 사기도 했었고, 슬픔 또한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죽은 아이가 내 자식과 비슷한 연령대라서 무척 힘들었다. 연관이 없는 나도 이럴진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어떨까. 앤 역시 매튜 아저씨를 먼저 보내드리고, 깊은 슬픔에 침잠한다. 같이 살아가고, 추억의 한 장으로 남겨진 이유. 그렇다. 그 속엔 '나와 너'가 함께 오롯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잃으면 슬픔을 묻으면 안 된다. 묻는다고 없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상흔 깊게 패이고, 어쩌면 회복되지 못할 골을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앤이 그랬듯, 마음껏 울고 슬퍼해야만 한다. 눈물로 슬픔을 분출해야 한다. 앤은 말했다. '우는게 그 아픔보다는 덜 괴로워요.'라고. 시간이 약이 될 수 없을지라도, 마음의 상처가 고름으로 썩어 문드러지지 않도록 마음껏 슬퍼할 사간을 가져야 한다.

'부모는 종종 자기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하고, 자신이 풀지 못한 인생의 숙제를 아이가 반드시 풀어주길 바란다고, 그래서 아이에게 자신이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의도치 않게 넘겨준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조건 없는 사랑처럼 보이는 부모의 사랑조차 폭력이 될 수도 있다.' (p. 109)

좋은 이모는 되는 건 쉬워도 좋은 엄마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나는 멋진 이모였다고 생각한다. 언니가 낳은 내 조카들을 보며 마음껏 사랑했었다. 아낌없이 놀아주고, 무조건적 관용을 베풀었다. 의무감보다 사랑으로, 전폭적인 지지로, 자애로움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정작 내 자녀에게 쏟아부어야 할 사랑과 관용과 지지는 '교육' 보다 한수 아래로 내려갔다. 자녀를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랑보다는 책임감의 무게가 더 크게 작용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그 일면에는 내가 해내지 못 했던 것들이 두려워서,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두려워 조카에게 했던 조언들과는 다르게 내 아이를 몰아세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으로 포장해서 내 두려움을 감추고, 나의 숙제를 떠넘기며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근 1년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겠다.

'우리가 무엇인가 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소설가 김훈이 말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지 않고 낚싯밥을 먹을 수는 없다."
모든 선택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이 선택의 본질이다. 샤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p. 171, 172)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사소한 하나라도 그것을 선택할 때, 심장이 쿵쿵댄다. 이 선택이 최선인가. 나와 내 가족과 앞으로 향해 나아갈 때 바른 선택인가 고민되는 요즘이다. 내가 선택하므로 얼마나 많은 리스크가 따라오는가. 과연 감당할 수 있는, 값어치가 있는 선택인가. 과감히 바늘을 물고 내 선택대로 걸어가질 주저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마음과 머리는 따로 놀 때가 많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열심히 보던 <빨강머리 앤>을 결혼하고 남편이 구해주어 열심히 봤더랬다. 중학교 때는 20권짜리를 한 권씩 사 모으기도 했고, 10권짜리를 도서관에서 구해 읽기도 했다. 실수투성이 앤이 자라서 대학도 다니고, 선생도 하고, 길버트와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장성한 이야기들까지 말이다. 이번에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읽으며 앤과 마릴라 아주머니, 매튜 아저씨가 하는 말들을 글로 읽는데도 마치 음성이 자체 지원되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요즘처럼 감정의 등락폭이 컸던 때에, 앤이 하는 말을 읽으니 다시 가슴이 설렌다. 단호한 듯 사실은 정이 깊은 마릴라와 언제나 앤의 편인 매튜 아저씨는 여전히 울컥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사유했던 백영옥 작가의 이야기들이 왜 이다지도 모든 글들이 마음을 찌르는지 모르겠다. 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들뜬 마음이 작가의 이야기로 나를 다독인다. 이름으로 고민하고 소설가가 되기 위해 걸어갔던 험난한 여정, 친구들에 대해, 때로는 자녀에 대해, 첫사랑을 보내고 남자친구가 남편으로 같이 살아가는 허심탄회한 작가의 이야기들이 말이다.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던 앤. 그리고 그녀를 보며 위안을 얻고, 기적을 체험한 백영옥 작가처럼 나 또한 작은 기적을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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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유리의 검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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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애비야드의 소설 레드퀸의 두 번째 시리즈가 나왔다. SF 판타지를 여성작가의 힘으로 치우침 없이 굵직하게 그려나가고 있는 이 작품은, 적혈과 은혈이라는 피의 색으로 신분이 갈리는 사회, 은혈의 지배를 받는 적혈들의 왕정국가를 그리고 있다. 적혈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웃에 근접한 적국의 총알받이 신세가 되어야 하는 배로우 가의 여식, 메어도 역시 오빠들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지만 우연찮게 알게 된 칼의 도움으로 결국 노르타 왕국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메어는 적혈임에도 번개를 다룰 수 있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황태자 칼의 동생, 메이븐의 약혼녀가 된다. 자신의 피의 색, 적혈로 이루어진 진홍의 군대를 암암리에 돕는 메이븐을 따라 메어 역시 도움을 자처하지만, 이것은 결국 칼을 누르고 또 왕을 없애 메이븐과 왕비의 계략에 놀아난 꼴이 되어버린다.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사형 당일, 구사일생으로 진홍의 군대에 의해 구출된다. 
 

두 번째 시리즈 <적혈의 여왕 : 유리의 검>은 메어의 오빠 쉐이드가 탈영 후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 있으며, 그 또한 자신처럼 적혈임에도 은혈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홍의 군대에 소속된 채 자신과 칼을 데리고 내얼시로 도망하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다. 메이븐은 에어젯과 은혈들을 데리고 이들을 추격하고, 진홍의 군대 일원들과 오빠를 구하기 위해 자처해서 메이븐 일행과 맞서지만 위기에 빠질뻔한 것을 칼의 도움으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향하게 된 진홍의 군대와 노르타 왕국의 적국인 레이크랜즈 군대들이 포진해 있는 '턱' 섬에 이르게 된다. 은혈이라는 이유로 겉돌던 칼을 레이크랜즈 군인들이 체포해가고, 적혈이나 은혈보다 능력이 뛰어난 신혈이라는 이유로 메어 역시도 적혈들과 융화되지 못한다. 칼을 구한 메어는 메이븐은 신혈들을 죽이므로 점점 압박해오는 것에 맞서기 위해 신혈들을 구하면서 메어의 능력은 점점 끌어 올려진다. '누구든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메어. 메이븐의 배신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른 그녀는 한때 마음을 주었던 적이자 동반자인 칼의 배신 역시 가능하다는 것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 또한 직시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메이븐에 맞서지만 결국 함정에 빠져든 메어,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메이븐.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

전작 <적혈의 여왕>에서 우리의 주인공 메어는 배로우 집안에서 별 능력 없이 소매치기가 특기인 소녀에 불과했다. 다만 그녀는 군대로 끌려가야만 하는 친구 칼린을 위하는 마음의 소유자였고,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놓지 않았으며,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위태롭게 은혈로써 살아갈 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메이븐의 배신과 회유 속에서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완강한 소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녀의 마음이 우왕좌왕했다는 것을. 아직은 10대이기에 피 끓는 혈기 외에도 가슴 여린 소녀가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역시나 메어는 메이븐에게 쫓기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또한 폭주할 수도 있으며 죽은 사람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안도하는 그녀의 이기를. 무엇보다 진홍의 군대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에는 거창한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하지만 메어는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서, 무엇이 잘못되고 무고한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나갔으며, 그릇된 지도자에 의해 핍박받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피에 의해 구별되는 세계, 노르타 왕국에서 자신은 적혈임에도 은혈과 같은 아니, 은혈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새로운 집단 '신혈'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을 압박하며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친절하게도 자신을 배신한 메이븐과 그의 엄마 엘라라 왕비를 향해 칼을 겨눌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것만이 세계를 뒤집어, 은혈 아래 존재하는 적혈이 아닌, 은혈과 적혈이 나란히 어깨를 겨루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신혈들을 끌어모으고 어느덧 무리의 중심축이 되어 있는 메어는 진홍의 군대와는 노선을 달리할 수도 있는 칼인 것을 알지만 여전히 함께 달려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변한 모습이 때론 메이븐과도 같이 냉혹한 괴물처럼 보일지라도.

이번 작품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전투 장면일 것이다. 내얼시에서 벌어지는 전투신도 그렇고, 신혈들을 하나둘 찾아가는 길, 그리고 그들과 무리를 이루고 그들 각기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해 가며 전투를 치르는 장면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흥미진진하단 말인가. 더불어 여전한 빅토리아 애비야드의 매력적인 문체는 읽는 시간만큼은 완벽하게 시공간을 우주의 한 공간, 정확히 노르타의 바로 그 지점에서 메어가 느끼는 감정들을 공명하듯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고민과 그녀의 갈등과 그녀의 외로움과 그녀의 그리움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아직 그녀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더 있음을. 아직 어린 그녀이기에 앞으로 더 많이 달금질 되어야 함을. 

매력적인 나쁜놈 메이븐은 맞지 않는 왕관을 쓰고 있으며, 그의 악행으로 자질 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메어는 자신을 걸고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이 앞으로 어떤 험난한 길을 걸어가게 할 것인지, 그녀가 걸어갈 가시밭길을 통해 어떤 미래가 그려질지, 어떻게 성장해 그들을 하나로 이루어갈지 3부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빛나는 캐릭터들 속에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이 전복인지, 평등인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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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라스트 레터
조조 모예스 지음, 오정아 옮김 / 살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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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편지를 쓴 적이 언제였던가 곰곰이 생각해본다. 글씨 쓰는 것에 그다지 자신이 없기 때문에, 편지 쓰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가끔,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느낌을 적을 때가 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빠르게 써 내려가다 보니 당연히 글씨체는 엉망이 되고, 나중에 다시 읽어보게 될 때는 망연한 마음이 든다. 에헤. 이래서 내가 손글씨를 기피하지, 하는 것도 빼놓지 않으면서.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손편지를 통해 친구들과 진심을 나누었던 교류들을 보게 되면 여전히 떠오르는 미소와 함께 그때 그 감정들이 다시금 떠오르곤 한다. 이다지도 열중했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이번에 읽게 된 조조 모예스 신간 <더 라스트 레터>는 손편지가 갖는 엄청난 위력이 담긴 작품으로 1960년과 2003년, 두 인물을 보여주며 늘 그랬듯 사랑에 대해 또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60년.
제니퍼 스털링은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은 채로 병원에서 깨어난다.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단어들에게서 낯섬을 느끼며 서서히 하나씩 깨우쳐가는 중이다. 퇴원을 하고, 자신에게 광산업으로 성공한 사업가 남편이 있다는 것이, 그 남편이 타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이 괴리감 속에서 허우적 거린다. 그러다 한 통, 두 통 발견하게 된 편지들을 읽으며 자신이 잃었던 기억의 구멍의 실체가 다른 누군가와 나눴던 진실한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주위 사람들을 만나가며 탐구 중이다. 그러나 그 남자가 죽었다고 듣게 되고 독선적인 남편의 결혼 생활에 대해 의문을 품어갈 때쯤, 한 파티 장소에서 죽었다던 앤서니를 만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남편의 꽃이 아닌, 인격적인 객체로서 살아가는 길을 택하지만 앤서니와는 어긋나게 된다.
 
2003년.
신문사에서 특집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는 엘리 하워스는 신문사 이전으로 정리하는 중, 자료실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된다. 40년 전 앤서니가 제니퍼 스털링에게 보낸 진실한 사랑의 편지였다. 그녀 역시도  현재, 스릴러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부남 존과 불륜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도서관 로리의 도움을 받게 되고 이 편지를 가지고 칼럼을 쓰려고 주인을 수소문한다. 40년간 한 통도 받지도 못했음에도, 같은 사서함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들에게 어떤 스토리가 있는 것일까. 
 
** 
 
조조 모예스 작품들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소위 흔한 로맨스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해서 행복했다,라는 공식은 통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그리고 이건 무게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랑한다. 그리고 더해진 아픔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사랑한다. 그리고 주어진 가시밭길을 헤칠 수 있겠는가. 사랑한다, 사랑하니까, 사랑만을 바라보던 사람에게 과연 어디까지 사랑을 위해 희생할 수 있겠는가, 사랑을 믿고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독자들의 대답을 기다린다. 
 
이번 작품 역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소재 자체는 대단히 민감한 '불륜'이다. 이것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지는 도덕적 잣대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1960년대 실상을 반영한 수동적인 여인상을 가진 제니퍼가, 사랑을 제외한 채 세상 잣대로 남편을 고르고 파티와 옷과 보석만을 가치로 살아가던 그녀가, 앤서니를 통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을 통해 능동적인 여성상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들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랑과 진심이 가득 담긴 '편지'를 통해, 그의 진심을 절절히 깨달으면서 말이다. 말보다 글이 가지는 위력이란 이토록 거대하기에 나 또한 앤서니의 편지를 읽을 때 가슴이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진실된 편지를 통해 존과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사랑을 하고 있는 엘리를, 진실한 사랑을 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상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만든다. 엘리 역시 존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일보하고 자신을 위한 사랑을 위해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며, 앞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선언을, 고백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전 두 작품 <허니문 인 파리>와 <당신이 남겨 두고 간 소녀>에서 그림이라는 매개체로 다른 시대에 사는 두 인물의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손편지를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소재 자체가 불륜이라는 민감성 때문에 완벽히 받아들이기엔 미진한 면이 있지만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묘사들이 퍽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고전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감정의 진폭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제는 흔하디 흔한 인터넷이 기반 위에 전자우편이라는, SNS라는 통신수단에 뒤로 밀려나버린 손편지. 어쩌면 구식이라 느껴질법하지만 여전히 정성 가득하고, 로맨틱하고, 진심을 어루만질 수 있기에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그 잔상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었던 <더 라스트 레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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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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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7부작 시리즈 중 1부<로마의 일인자>, 2부<풀잎관>에 이어 3부 <포르투나의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면 단연 카이사르라 할 것이다. 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저, 이집트까지 건너가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올려놨으며, 그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명언을 남긴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카이사르가 전면에 나서기까지 술라와 마리우스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1, 2부에서 그들의 정쟁과 치밀한 전술들을 통한 야망들을 볼 수 있었다. 서로 한 번씩 치고받는 권력게임들 속에서 7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마리우스의 죽음으로 행운의 여신인 포르투나는 술라의 손을 잡은듯했다. 그리고 3부에서 제1차 삼두정치의 거물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가 등장하고 그중 술라를 등에 업은 폼페이우스의 이야기로 <포르투나의 선택>은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포르투나는 술라의 손을 잡고 있던 터라 3부 1권의 대부분은 술라의 이야기로 끌어가고 있다. 마리우스와 킨나가 죽고 술라가 이탈리아로 진입하고 브루투스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독재관이 된 카르보와 싸움에 돌입한다. 이 싸움에서 술라는 예전처럼, 어렸을 때는 남자들의 시기를 받고 커서는 여인들이 부러워했을 정도의 아름다웠던 그의 외모가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붉은 가발을 쓰고 화상으로 그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버렸듯이 성격 또한 흉포하게 변해 버렸다. 이탈리에 땅에 들어서고 전쟁을 치르며 피가 낭자한 입성이 아닌, 최대한 모두(다수)가 원해서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유지하려 했으나, 그와는 다른 양상으로 자신과 반대편에 선 자들을 소리 소문 없이 처치해 버리는 등 잔인한 모습을 서슴치 않는다. 

"포르투나 여신의 선택을 받은 건 나지! 내게는 늘 운이 따랐어. 하지만 거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기억하게. 포르투나는 질투심이 강하고 요구가 많은 애인이야." - 술라 
"
무릇 애인이란 그래야 제맛이죠!" - 카이사르 (p. 426) 


자신을 집정관 위의 독재관이란 지위에 올려놓으며 명실상부 종신 일인 독재체제를 이룩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로마시대 중 가장 곤고한 귀족 중심의 공화정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포르투나는 한 사람만 편애하지 않으니, 그를 잡은 손에서 서서히 다른 사람으로 손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인물이 카이사르겠다. 물론 이 책에서는 알렉산더대왕의 현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용맹하고 잘생기고, 전장의 신만큼 완벽해 보이는 폼페이우스가 초반을 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로마를 손안에 쥔 술라의 뜻에 반할 소신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 이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주인공으로 카이사르 주인공 임에야. (사실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그의 아내 킨닐라와 헤어질 것을 강요했으나, 술라의 말이 곧 법인 로마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고 술라를 피해 도망치기에 이른다.) 


오죽했으면 마리우스조차 그의 위상이 범상치 않을 것임을 예언을 통해 알아보고 굴레를 씌울 목적으로 유피테르 대제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까. 포르투나의 행운이 미쳤기 때문일까. 술라는 대제관을 임명한 사람이 마리우스라는 것을 알고 신분을 회복해 준다. 


이제 지는 해라지만 아직은 노련한 정치가 술라에 맞서러면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폼페이우스 말대로 이제 태양의 동쪽 하늘에 뜨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젊고 혈기 왕성하지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삼두정치의 나머지 일인 크라수스가 로마에서 활발한 활동과 입지를 다지기까지 조금은 더 다듬어져야 할 것이다.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했던가. 그가 다듬어져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내세우게 된다면, 그는 시대를, 세계를 아우르는 영웅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항상 행운(운명)의 여신이 자신과 함께 한다고 해서 '운명의 총아'라고 불리는 카이사르는 군사적인 지략도 뛰어났지만 뛰어난 웅변술에 민심의 행방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공화정 실권을 쥔 원로회를 와해시킨 인물로 유명하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술란과 닮은 듯, 마리우스와 닮은 듯하지만 오히려 이들을 밟고 우뚝 선 영웅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사람은 그 행운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듯 브루투스에 의해 짧은 생을 마칠 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생이 아깝고 찬란했던 행보에 안타까움이 함께 드는 것이다. 


이 작품을 쓴 작가가 <가시나무 새>를 쓴 작가 콜린 매컬로란다. 그래서 그런지 이와 비슷한 류의 로마 역사소설 같지 않게 스토리가 짜임새 있고 가독성이 뛰어나서 읽기 수월했다. 매 순간이 재미있었지만 특히 카이사르의 엄마 아우렐리아가 술라에게 느끼는 감정과 엄마로서 카이사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 등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생소한 지명과 역시 익숙지 않은 인명들을 읽어 나감에도 막힘이 없었기에 역사소설이 이와 같다면 10권이든 20권이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는 총 7부다. 이제 3부 시작이고, 바야흐로 본격적인 인물들의 각축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재미는 물론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 덕분에 읽는 내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찬란했던 로마 공화정 말기, 이번에는 과연 포르투나는 누구의 손을 움켜쥐며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을지, 또 그 이야기들은 어떤 재미를 선사할지 다음 권의 콜린 매컬로의 매력적인 필치가 더욱 기대되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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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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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다가밤을 꼴딱 새운 적이 몇번 있다때로는 공부를 목적으로때로는 안전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밖의 생활이 궁금해 일부러 밤을 지새우기 위해낮과 밤이 주는 느낌의 차이는 참으로 명확하다에너지 발산을 유도하는 듯이 활기차고만물들이 생동감있게 살아 있는듯 하다굳이 밖이 아니더라도낮은 '동반자같은 느낌을 준다하지만 밤은 나를 찍어누른다중력을 더 세게 받고습한 기운에 포위당하는 듯한 기분이다실내에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도 않건만 발걸음은 신중해지고동작은 느려진다내게 낮과 밤의 간극은 참으로 크다.


무라카미 하루키 등단 25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그의 11번째 소설 <애프터 다크>. 알고 보니 <어둠의 저편>이 제목만 달리해 출간한 것이란다어둠의 저편이든애프터 다크든 추구하는 바는 하나이리라.


이 작품은 12시를 4분 남겨둔 밤 11 56분부터 다음날 6 5분까지의 바깥에서 잠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데니스에세 꽤 두툼한 책을 읽고 있는 마리에게 키 큰 남자 다카하시가 지나치듯 말을 걸어온다그는2년 전 마리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에 원치 않게 언니와 더블데이트를 호텔 수영장에서 한 사이다별로 내키지도 않았기에 그저 돌고래처럼 수영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운을 띄운 그는 간단한 식사 후 연습실로 향한다잠시 후 러브호텔애정과 아이러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섹스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의 '알파빌매니저 가오루가 찾아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마리에게 도움을 청한다러브호텔 룸에서 몸을 파는 중국여자에게 문제가 생겼고경찰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불법 체류 중이라고 추측되는남자에게 얻어맞아 피가 범벅인 중국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중국어로 통역하며 가오루를 도와주게 된다가오루는 중국여자를 그 지경으로 만든 남자를 찾게 된다그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프로그래머이나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면을 갖고 있다.

 

이와는 다른 곳에서 마리의 언니 에리는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지만 현재 두 달째 잠을 자고 있다에리의 모습을 자는 모습 하나하나를 카메라로 보여주면서 조금 달라진 면조차 쫓아가듯 섬세하게 보여준다마치 이 작품의 주요 핵심 내용이라는 듯 보여주지만 정작 원인은 알려주지 않는다마리는 다카하시를 통해 언니 에리의 몰랐던 점과자신이 에리에게 느꼈던 것들을밤의 마력에 홀려서 인지 밤이 아니라면 묻지 않았던 것까지 알려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맴도는 노래가 한영애의 '누구 없소'였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어둠은 늘 그렇게 벌써 깔려있어

한 검어진 대답하듯 달빛에 두드리는 골목길에

그냥 번 불러봤어

 

어둠 속 생활을 불러주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한밤의 스케치 같은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창공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방식을 취한다글을 읽으면 왠지 작중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특히 마리의 언니 에리가 자고 있는 공간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그곳의 냄새를 맡는 등 CSI의 예리함을 가지고 관찰하게 만들며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따라서 독자는 에리의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고 있는 듯한 죄책감까지 가지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이 얼마 동안 계속됐는지는 기억 안 나아주 오랜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실제로는 그렇게 오래가 아니었을 지도 몰라그렇지만 오 분이건 이십 분이건 구체적인 길이는 문제가 아냐아무튼 그동안 에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내 날 끌어안고 있었어그것도 그냥 끌어아는 거랑 달라우리 둘의 몸이 녹아서 하나가 될 만큼 꽉 끌어안았던 거야에리는 잠시도 힘을 풀지 않았어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이제 두 번 다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할 것처럼." (p.226)


작품 중에 나오는 에리가 안전한 곳에 잠들어 있는 것과 대비되는언제까지 잘지 모르는 것과 그녀와 완전히 선을 긋듯 밖의 생활을 진취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리의 '이해 가능한일탈은 그저 우리의 삶이 낮이 밤이고, 밤이 낮이 되어도두 세계가 극명하게 나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가 나 자신이라는 관념을 명확하게 갖고 있다면잃을 것도 없다는 듯이 말해 주는 듯하다하루를 길게 연장하고 어두운 기운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또 다른 장소일 뿐이라고.

 

어둡고짙고어디로 튈지 모르는 세계 같지만 이제 한번 불러주기를 원할지도 모르겠다비교적 짧은 글 속에 다카하시와 마리의 대화에 참여하며 미디엄사이즈와 짧은 이야기도 사뭇 재미있게 다가온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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