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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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다가밤을 꼴딱 새운 적이 몇번 있다때로는 공부를 목적으로때로는 안전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밖의 생활이 궁금해 일부러 밤을 지새우기 위해낮과 밤이 주는 느낌의 차이는 참으로 명확하다에너지 발산을 유도하는 듯이 활기차고만물들이 생동감있게 살아 있는듯 하다굳이 밖이 아니더라도낮은 '동반자같은 느낌을 준다하지만 밤은 나를 찍어누른다중력을 더 세게 받고습한 기운에 포위당하는 듯한 기분이다실내에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도 않건만 발걸음은 신중해지고동작은 느려진다내게 낮과 밤의 간극은 참으로 크다.


무라카미 하루키 등단 25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그의 11번째 소설 <애프터 다크>. 알고 보니 <어둠의 저편>이 제목만 달리해 출간한 것이란다어둠의 저편이든애프터 다크든 추구하는 바는 하나이리라.


이 작품은 12시를 4분 남겨둔 밤 11 56분부터 다음날 6 5분까지의 바깥에서 잠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데니스에세 꽤 두툼한 책을 읽고 있는 마리에게 키 큰 남자 다카하시가 지나치듯 말을 걸어온다그는2년 전 마리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에 원치 않게 언니와 더블데이트를 호텔 수영장에서 한 사이다별로 내키지도 않았기에 그저 돌고래처럼 수영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운을 띄운 그는 간단한 식사 후 연습실로 향한다잠시 후 러브호텔애정과 아이러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섹스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의 '알파빌매니저 가오루가 찾아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마리에게 도움을 청한다러브호텔 룸에서 몸을 파는 중국여자에게 문제가 생겼고경찰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불법 체류 중이라고 추측되는남자에게 얻어맞아 피가 범벅인 중국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 중국어로 통역하며 가오루를 도와주게 된다가오루는 중국여자를 그 지경으로 만든 남자를 찾게 된다그는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프로그래머이나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면을 갖고 있다.

 

이와는 다른 곳에서 마리의 언니 에리는 완벽한 외모를 자랑하지만 현재 두 달째 잠을 자고 있다에리의 모습을 자는 모습 하나하나를 카메라로 보여주면서 조금 달라진 면조차 쫓아가듯 섬세하게 보여준다마치 이 작품의 주요 핵심 내용이라는 듯 보여주지만 정작 원인은 알려주지 않는다마리는 다카하시를 통해 언니 에리의 몰랐던 점과자신이 에리에게 느꼈던 것들을밤의 마력에 홀려서 인지 밤이 아니라면 묻지 않았던 것까지 알려준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 맴도는 노래가 한영애의 '누구 없소'였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어둠은 늘 그렇게 벌써 깔려있어

한 검어진 대답하듯 달빛에 두드리는 골목길에

그냥 번 불러봤어

 

어둠 속 생활을 불러주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한밤의 스케치 같은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창공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방식을 취한다글을 읽으면 왠지 작중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특히 마리의 언니 에리가 자고 있는 공간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그곳의 냄새를 맡는 등 CSI의 예리함을 가지고 관찰하게 만들며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따라서 독자는 에리의 사적인 공간을 침해하고 있는 듯한 죄책감까지 가지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이 얼마 동안 계속됐는지는 기억 안 나아주 오랜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실제로는 그렇게 오래가 아니었을 지도 몰라그렇지만 오 분이건 이십 분이건 구체적인 길이는 문제가 아냐아무튼 그동안 에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내 날 끌어안고 있었어그것도 그냥 끌어아는 거랑 달라우리 둘의 몸이 녹아서 하나가 될 만큼 꽉 끌어안았던 거야에리는 잠시도 힘을 풀지 않았어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이제 두 번 다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할 것처럼." (p.226)


작품 중에 나오는 에리가 안전한 곳에 잠들어 있는 것과 대비되는언제까지 잘지 모르는 것과 그녀와 완전히 선을 긋듯 밖의 생활을 진취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리의 '이해 가능한일탈은 그저 우리의 삶이 낮이 밤이고, 밤이 낮이 되어도두 세계가 극명하게 나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가 나 자신이라는 관념을 명확하게 갖고 있다면잃을 것도 없다는 듯이 말해 주는 듯하다하루를 길게 연장하고 어두운 기운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또 다른 장소일 뿐이라고.

 

어둡고짙고어디로 튈지 모르는 세계 같지만 이제 한번 불러주기를 원할지도 모르겠다비교적 짧은 글 속에 다카하시와 마리의 대화에 참여하며 미디엄사이즈와 짧은 이야기도 사뭇 재미있게 다가온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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