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일이면 눈이 멀게 될 사람처럼 이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 헬렌켈러



 한 주 더 미루고 싶었다. 주 초부터 바빠진 업무스케줄 때문에 일주일 전에 미리 예약 해 두었던 안과검사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미뤄 본들 다음 주는 여유 있겠나 싶어 얼른 검사를 마치고 바로 회사로 복귀하자는 생각에 출근하자 마자 회사 동료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얘기한 후 병원으로 향했다. 늦어도 한 시간 이상은 걸리지 않을 거라는 나름의 판단을 한 터였다.



 아침 9시 10분 검사였기에 대기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바로 접수를 하고 검사에 들어갔는데 검사는 대략 30분 정도가 걸린 것 같았다. 검사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의사가 직접 안구검사 기기를 통해 눈안을 들여다 보았다. 오후 업무일정 때문에 얼른 처방을 받고 내려가려던 내게 의사는 대뜸 '수술하셔야겠습니다' 라고 했다. 순간 어리둥절 하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었다. 뭐가 잘못됐냐고 되묻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내게 의사는 상태가 너무 좋지 않기 때문에 오늘이라도 수술을 하자며 오늘 수술일정을 확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술을 하고 10일 이상을 입원해야 한다는 말에 눈 앞이 캄캄해져 오는 중에도 일단 일 때문에 수술과 입원은 미뤄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음 주로 수술일정을 잡아달라고 해봤지만 지금 상태로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답변이었다. 먼저 직장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바로 병원으로 달려와 주었고 의사의 소견대로라면 당장 수술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니 빨리 회사에 전화부터 하라고 독촉을 했다. 그래서 회사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업무를 모두 팀 동료들에게 부탁을 한 후 추가 검사를 몇 가지 더한 후 다음 날 수술할 예정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오른 쪽 눈은 상태가 심각해 수술을 해야 했고, 왼쪽 눈 역시 상당히 문제가 진행된 상황이었다. 우선 레이저 시술로 응급처리는 했지만 왼쪽 눈 역시 심각해 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거의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의 오후 5시가 지날 때까지 안과에 머물며 모든 검사와 수술 전 조치가 끝난 후 양쪽 눈 모두 붕대로 안대를 하여 앞을 전혀 못 보는 상태에서 동생 손에 이끌려 병실로 옮겨졌다.



 병실에 두 눈을 보지 못한 채로 누워있자니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눈을 모두 가리고 있는데다 자칫 실명할 수도 있었다는 의사의 말, 그나마 왼쪽 눈까지 심각해 질 수 있다는 의사의 말만 떠오르니 가장 최악의 상황일 경우 두 눈 모두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평소 사고나 병으로 인해 갑자기 실명을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라면 저런 상황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두 아들 녀석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안타까움만 더해갔다.



 백혈병으로 고통스럽게 죽었던 딸의 이야기를 담았던 《울지마,죽지마,사랑할거야》의 서연이가 떠올랐고, 암투병 중에도 희망을 이야기했던 장영희교수님, 우리의 내면에는 죽음의 공포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극복의 힘》등 온통 내 머리 속을 채우고 있던 절망감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돼줄 만한 메세지를 담았던 책들을 떠올리려고 무척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실명할 위기에 빠져있던 그 순간에 떠올려야 했던 책은 바로 헬렌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여러분의 눈을 사용하십시오.라고 했던 그녀의 말을.



 다행히 다음 날 오른쪽 눈 수술 후의 경과가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비록 퇴원 후 재발했지만) 레이저 치료를 한 왼쪽 눈 역시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아 실명에 대한 두려움은 차츰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입원 중 내가 빨리 심적인 안정을 찾고 지금 힘든 이 순간을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던 장영희 교수님의 유고집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였다. 입원 후 내가 느끼는 절망감과 고통은 장영희교수님이 겪었을 고통에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지만 교수님은 오히려 희망과 용기를 독자들에게 전해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너무나 공감했던 것은 삶 자체가 축복이고 사랑이 최고이고 하루하루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이론'이 '실제'가 된 순간을 교수님처럼 나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는 없지. 이 좋은 세상에서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이제는 진짜 한번 잘 살아봐야지. 죽도록 앞만 보고 뛰느라고 한번 쉬어 본 적도 없는데, 이제는 쉬엄쉬엄 주변도 돌아보고 내가 가르친 이론대로 잘 살아봐야지.(P.122)



 췌장암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스티브 잡스가 "죽음은 삶을 리모델링한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며 낡은 아파트만 리모델링하는 게 아니라 삶도 리모델링할 수 있고, 병은 우리가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롭게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라고 교수님은 덧붙이셨다. 입원한 첫날 내게 물밀듯 밀려왔던 불안감과 절망감의 원인은 내가 평소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소중한 시간들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다고도 생각한다.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목숨인데 살아있는 것에 항상 감사하지 않고 더 사랑하며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가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 눈이 회복되어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내게 있어 삶의 의미는 달라져 있을 것이고 나의 삶에 대한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페페 신부님은 덧붙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모든 진리를 삶을 다 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너무나 쉽고 간단한데, 진정한 삶은 늘 해답이 뻔한데, 왜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 (P.141)



마치 세상을 다 살아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내게 이말이 너무나도 크게 와 닿았다. 그리고 이제는 더 미루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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