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모래알 같이 - 정선엽 초단편소설집
정선엽 지음 / 별빛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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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린 다음에

해변 쪽을 향한 유리창 앞에 앉아

랩톱을 무릎에 올려놓고서 자판 위에 양손을 올렸다.

키보드 위에서 아주 작은 뭔가가 만져졌고

난 그것을 손가락에 붙여서 눈앞으로 가져왔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그 안에 숨어있던 모래알들이 키보드 위쪽으로 떨어졌다.

워드프로그램 화면에는 검정색 커서가 반짝거렸고,

머리에 쓴 헤드폰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 해변의 모래알 같이, 정선엽 "

처음 보는 작가의 짧은 단편 소설집을 만났다.

흑백의 바다와 모래사장이 보이는 사진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색이 존재하지만 내가 아는 그 색이 아니다.

기억 한켠에 있는 낯선 바다의 한 장면, 슬리퍼를 신은 발에 닿은 부드럽지만 가슬 거리는 모래알들, 먼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혼자 잠시 바다와 생각에 잠겨보는 시간들. 처음 책 표지를 보았을 때 연상되는 느낌은 딱 이 정도였다.

사람은 시각적인 게 중요하다. 그래서 표지는 책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사실은 이 책이 그랬다.

실제로 책에서 내가 발견한 문장이나 감정선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예상했던 감성 가득한 책은 아니었지만, 작가님만의 특유의 유니크함과 필체가 매력적이었다.

사실 요즘 읽은 에세이들이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 책은 신선했다.

아마 소설이라 더 그런것 같다. 19개의 짧은 소설들이 담겨있다. 제목도 도전적이다.

따스한 바람보다는 고요히 홀로 부는 스산한 바람 같기도 했다.



안경을 벗고 길을 걸을 때

자살을 할 거야 하늘 끝으로

닭대가리 페티

그냥 놔둬

어제 전화가 왔는데

입국카드 앞에 놓고

절망에 관하여

해변의 모래알 같이

버스에 타자

그때랑 별로 변한 게 없네

작업실을 얻을 거야

정통 어메리칸 스타일 피자

카푸치노맨

용사가 되는 세 번째 루트

우리 세 사람, 무대에서

너도 뭔가 느꼈을지 모르지 그 노래를 들었다면

본관 3층 자판기 커피

계단을 뛰어서 내려오는 걸 봤어

시간이 걸리는 일



짧은 호흡들로 이루어진 책이라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문장이었다.

오랜만에 책 속의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글보다는 작가님이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나는 이 문장이 좋았다.

사연이 있어 보이는 두 주인공, 별다른 대화 없이 전시를 보고 난 뒤

" 그때로 별로 바뀐 게 없네"

현재의 모습에서 과거를 찾아내는 반가움과 그리움의 표현이였으리라.

솔직했고, 거침없는 글들.

읽다 보면 묘하게 끌리는 글이다.

처음의 낯설고 익숙지 않은 문장들을 지나면 재미난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조금만 참고 견뎌보시길.

 

 

 

[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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