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장대익 교수는 책의 시작에, '공감에 대한 통념은 타인이 슬퍼하면 나도 슬프고 타인이 기뻐하면 나도 기쁜 것, 남의 작은 상처에 눈물 흘리는 게 높은 공감 능력이고 그런 사람이 더 이타적이고 도덕적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이러한 공감에 대한 통념이 수정 보완되어야 함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장대익 교수는 후술하여, 공감은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나뉘는데, 인지적 공감은 느낌을 넘어서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이성이고 의지적인 활동이라고 정의한다.인간에게는 정서적&인지적 공감이 다 필요하고 이것이 문명의 기반이 되는데 우리는 정서적 공감만으로 공감의 반경을 제한하고, 이것은 나와 연관되어 있는 나의 '내집단'에 대한 지나치게 깊고 좁은, 배타적인 공감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통념과 달리 공감은 무한정한 자원이 아니고 사용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내집단에게 공감을 준 사람들은 외집단에 그만한 공감을 줄 여유가 없다. 내집단에 대한 선택적 과잉 공감은 외집단에 대한 폭력이 되기 쉽다 - 도덕적 판단조차 이 두 집단을 구별하는 도구로써 만들어졌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부족 본능은 인간에게 뿌리 깊고 호르몬으로도 뒷받침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적대적인 이 본능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SNS가 더 많은 사람들과 배리어 없는 소통을 하게 해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공감하는 구조 속에 확증 편향을 증폭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이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동조 본능은 타격을 입고 집단의 압력은 감소한다.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가 타인을 평가할 때 두 가지의 기준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개인 뿐 아니라 집단의 범주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 '그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가 두 가지 기준이며, 각각 따뜻함과 유능함으로 연결되는 이 두 개의 척도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는 차갑고 유능하며 (시기의 대상), 전문직 흑인은 따뜻하고 유능하고 (존경), 주부는 따뜻하고 무능한 존재 (연민), 가난한 흑인은 차갑고 무능한 존재로 인식된다. 말할 것도 없이 네번째 집단이 가장 비인간화되기 쉽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것은 인간은 유능/무능의 이성적 척도보다는 따뜻/냉정의 감성적 척도에 더 예민해 보인다. (페미니스트는 시기의 대상이지만 주부는 경멸이 아닌 연민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상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