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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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단편을 이미 접했었고 '이거 물건이네' 싶어, 작가의 첫 책은 읽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무려 도서관에 희망도서 대기신청까지 걸고 일빠로 빌려 읽은 책. 내 뒤로 길게 줄 서 있는 도서관 이용자들의 수가 증명하듯, 오랜만에 한국소설계에 등장한 앙팡 테리블이다. 데뷔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9편의 소설을 묶어 첫 단편집을 낼 정도이니 더 말해 뭐하겠나. 기존에 읽었던 세 편을 다시 읽고 - 역시 이 세 편이 제일 좋았고 - 나머지 여섯 편도 읽었는데 모두 만족스러웠다.

김기태는 흥미롭게도 알튀세르가 사용했던 '호명' 개념을 소설에서 즐겨 사용하며 이 이데올로기의 부름을 분쇄하는데 책 전체의 힘을 쏟는다. '전조등'과 '보편 교양'에서 호명이라는 단어는 직접 등장하고, 나머지 여덟 편의 소설도 사실 '호명'과 그에 대한 반박의 서사들이다. 첫 소설 '세상 모든 바다'는, '세상 모든 바다' 라는 이름의 세계적 K-걸그룹과 그 팬인 자이니치 4세대 '하쿠'의 이야기다. 달리 잘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그는, 부모의 나라에서 뿌리를 찾으려는 기특한 학생', 혹은 바로 그 이유로 '좋아하는 것을 다 말할' 권리를 가진 '기모이한 오타쿠'(20-21쪽) 로 호명된다. 그의 이러한 존재성은 세모바를 흉내낸 활동가 집단들의 부작위적 테러, 원전 이슈에 찬성하는 원전 지역 주민의 활동 같은 혼란스러운 정체성들과 뒤섞인다. 그리고 '거리낌 없이 좋아해도 되는 그룹'이라고 마음을 놨던 '세상 모든 바다'는 하얀 물보라와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는지 아니지 모르지만 나를 뒷걸음치게 만드는 존재로 그의 인생에서 '멋쩍게 슬슬' 사라진다.(36-377쪽)

두번째 소설이자, 어느 독자나 제일 매력적인 소설로 꼽을 '롤링 선더 러브'는, 깜찍하게도 '나는 솔로' 프로그램을 테마로 쓰여진 소설이다. 주인공 조맹희는, 그 옛날 '쪼매난이쁜이'의 존재를 아시는 분이라면 쉽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캐릭터고 심지어 이름조차 거기서 따온 듯 하다. 또한 '맹희'라는 이름은 blind girl을 연상시키기도 하여, blind date를 통한 사랑에 그야말로 blindly하게 돌진하는 그녀의 당찬 캐릭터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나 조맹희, 시원하게 굴러보고 싶다." (52쪽)라는 선언이나, 육체노동의 기쁨, 수레에 거름을 채워 밭에 뿌리듯 그저 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좋겠다(62쪽)는 그녀의 말들은 이 소설의 귀여운 섹시함, 건강한 육체성을 더해준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나 조맹희'로 엄숙하게 호명하는 그녀는 '나는 솔로'에서 그녀의 외모와 조건에 기반한 새로운 네임 '완두'를 부여받는데, 이 캐릭터는 소설 말미에서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겠다는 말로' 오독당하며 '독신 여성에 대한 편견을 이 세상에 보탠'(70쪽) 사람으로 인터넷 상에서 호명된다. 그러나 그녀 조맹희, 쉽게 죽지 않는다. 맥주잔을 내리치며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73쪽)을 일갈한 그녀는 발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소설의 하이라이트를 폭죽처럼 쏘아올리며 '구르더라도 부서지진 않는' 자신을 천명한다. 이 소설 전체는 '나 조맹희'의 '맹신과 망신 사이에 길을 잃을 충동과 예감 (76쪽)'이 타인들이 정해놓은 그녀의 '이러이러하고 이러이러해야 할 것' 이라는 호명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조맹희는 이러한 외부에서 주어진 정의들을 거부하고 완두로서 부여받은 '삽'을 '기타'로 바꾸어 연주하며, 스스로를 '완두'와 '콩알'이 아닌 '돌멩이'와 '총알'로 정의한다.

다음 소설인 '전조등'의 '그'는 조맹희와 대척점에 선 존재다. 일단 그는 이름이 없다. 그는 무난하다. 그는 이 사회에서 주입받은 '이러이러하고 이러이러해야할 것'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따른다. 연극반에 가입한 그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는 '스포트라이트' 밑에 한 번도 서본 적이 없고 설 생각도 없이, 그에게 주어진 NPC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연기'한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조각을 대리석 안에 감춰진 신의 형상을 꺼내는 일이라고 여겼고, 통계학은 숫자 안에 숨은 메시지를 꺼내는 일'(86쪽)이라는 교수의 말처럼, 그는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꺼내고 입으며 살아가는 일이 자신의 삶임을 잘 알고 있으며, '이상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것을 지시해서 거꾸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한다'(91쪽)고 정의내린 대로 규격에 맞춘 삶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런 그가 '그녀'를 아내로 선택한 것은 물론, 그녀 역시 주어진 역할을 연기-수행하는데 충실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청혼의 시퀀스는 긴장감이 있었으나 미래를 비춰주는 예고하는 자 '전조등'은 현실의 낡은 고무신짝을 맞고 깨어지며, 그녀는 청혼받는 자의 역할을 훌륭히 연기한다. 연극은 완성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도 계속, 인생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하게, 당장 해야 할 단순하고 명료한 일'(107쪽)을 받아들이며 불을 끄고 어둠 속의 NPC로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어둠 속의 NPC' 캐릭터는 이 다음 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진주와 니콜라이로 이어진다.

평범하다는 것. 평범하게 태어났으니 평범하게, 사회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룰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김기태가 그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시민이 지켜야 하는 덕목이다. 이에 반하는 반항적, 영웅적 캐릭터는 '나 조맹희'와 '오로나', '세모바'이지만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그들은 평범한 우리 - 하쿠, '보편 교양'의 곽, '태엽은 12와 1/2바퀴'의 은혜 아빠, '무겁고 높은'의 송희와는 다른 인물이다 (이들은 이름조차 반쪽이다).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유지하고 스스로를 호명하는 주체가 되어 기타를 연주하고 살아가는 이 세 '아이돌-이상'과 달리 , 책의 나머지 인물들은 NPC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며 산다. 소설 '보편 교양'의 '곽'이 신봉하는 헤밍웨이의 그 말 -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예고와 예감과 예언의 세계 속 영웅들'이 앞의 세 아이돌이라면, 그 반대인 '패배할지언정 파괴되지는 않는 삶'을 살며 '록은 죽었고 엿 같은 월급이나 내놔'(150쪽)라고 되뇌며 '아무에게도 예단할 권리는 없다'며 모범시민과 성숙한 어른을 연기하며 '어떤 지도도 하지 않는'(170-171쪽) 곽과 나머지 '평범한 이들'이 책의 남은 부분을 채운다. 그렇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사회가 고등교육을 받은 보통 수준의 시민에게 요구하는 '보편 교양'이다. '예'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한다는 것 -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에 맞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선을 넘는 행위'이며, 그것은 위험하고 파괴적인 '롤링 선더'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적 요구에 저항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그에 맞서 싸우는 자, '롤링 선더'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곽이 은재(숨은 재능)에게 가르친 20세기 최고의 혁명가 칼 마르크스일 것이다. 은재는 곽에게 고급 과자상자(곽box)를 건네고 떠나며, 그것은 곽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이름 그대로 box에 갇힌 삶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수업을 했으며 그러니 서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177쪽)고 생각하는 곽이지만, 그 많은 생각과 생각과 생각에만 휩싸여 있을 뿐 행동하지 않는 인물 곽, '불투명한 상황에서 미래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178쪽)라고 생각하며 예의와 교양의 장막 뒤로 안전하게 물러나는 곽은, 가장 역설적인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적 개인'이다.

그 중 가장 희망이 있어 보이는 인물은 말할 나위도 없이 표제작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진주와 니콜라이다. NPC로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임을 받아들인 '전조등'의 '그'와는 달리 이들은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143쪽)며 '나 조맹희'의 '예감' 쪽에 선다. 또한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가 아니라 일어서서 낯설고 새롭고 따뜻한'(142쪽)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은, 마지막 소설 '팍스 아토미카'에서 활주로 위에 서서 강박증을 떨쳐낼 주문을 찾아낸 '나' 와 동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의 NPC들은 확대되어, '로나, 우리의 별' 속의 수많은 '우리'가 된다. 붉은 도브를 연주하는 별, '좌파 메시아' 로나를 따르는 민중들. '이후의 역사는 로나에게만 달린 게 아니므로, 로나의 동지가 되어, 당신을 알고 싶어 하고, 당신이 단지 생존하기 위해 그렇게나 일하는 데에 지쳤다면, 더 많은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는 데에 쓰고 싶다면,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인지 의심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우리다.'(204-205쪽)고 선언하는 그들은, 새로운 전지구적 인터내셔널이 된다. (앞의 소설과 이어서 생각을 해본다면 '당근도기립하시오' 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는 아마도 진주 아니면 니콜라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들어올리기가 아니라 버리기 위해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고' (245,242쪽) 역도를 들어올렸던 송희는 소설의 말미에서 변화한다. '미래, 꿈, 희망'이라는 단어로 자본주의적 포장이 되어 있던 바벨을 '내 손 안에 있는 내 것'으로 인식하고 뜨겁게 들어올리는 송희. 그것은 역설적으로 '정말로 역도를 그만두는 것'이 되며, 버리고 포기하고 집어던지는 삶을 그만두고 '빙판과 진창의 시간을 예비하며'(263쪽) 살아가는 송희의 미래에 전조등을 쏘는 행위이다.

'자본론'의 서문을 다시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NPC 학생 세 명을 정확히 호명하는 교사 곽은, 과연 송희가 될 수 있을까. 책에서 가장 안전한 현실의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 서 있는 인물이 '전조등'의 '그'이고, 가장 이상의 삶에 발을 디디고 선 인물이 오로나와 조맹희라면, 나머지 인물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좌표를 찍고 있다. 가장 전조등 쪽에 가까운 이는 하쿠가 될 것이고, '보편 교양'의 곽이 그 다음이다. 송희와 진주와 니콜라이는 조맹희 쪽에, 로나의 팬들은 오로나 쪽으로 더 가깝게 서 있을 것이다. 독자는 그 스케일 중 어디쯤에 서 있을까? 혹은 누워 있을까? 이름이 없는 존재가 이름 세 글자를 다 가진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주어진 이름을 호명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가 낸 첫 책은 읽지 않는다는 원칙을 깬 걸로도 모자라 이렇게 긴 글을 남기는 것은, 김기태의 이 책이 그만큼 만족스러운 독서경험을 하게 해주었다는 증거다. '시발 하지 말라면 그냥 하지 마'(90쪽)라는 말 아래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동의 하지 않고, 가고 싶은 곳으로, 찾고 싶은 꿈으로'(204쪽) 떠나자는 이 책의 도발은 '암약하는 간첩 집단의 세계관만큼이나 황당하다 못해 순진해'(162쪽)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지금 서점가에서 누리고 있는 인기를 생각해보면 김기태의 이런 주제의식은 분명 활주로 위에 서 있다. 더이상 아무도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와 혁명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김기태는 책 한 권을 통털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이 책의 판매고는 그대로 그에 대한 응원과 동의의 표시일 터다. 호명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태로 살고 싶다는 지지 선언.

미래의 그 많은 불확실성 앞에서, 예고와 예감과 예언과 예단의 '예'들은 '할 수 있다'와 '하고 싶다'의 '예(YES)'가 된다. 연인이 아니라 '친한 사이'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진주와 니콜라이를 보라. 4시간 51분 분량의 95개국 인터내셔널가를 BGM 삼아 기운차게, 스패너와 손걸레를 손에 쥐고, 낯설고 새롭고 따뜻한 세상에 도착한 두 사람. 끊임없이 앙맨과 힝구와 옆집 사람들과 '친한 사이'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기립은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139-143쪽)이 되어, 아주 긴 시간이 지나면, 결국 실현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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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화질] 극주부도 12 극주부도 12
오노 코스케 지음 / 학산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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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으로 나오길 너무나 기다렸어요. 불사신 타츠 오늘도 전업 주부 외길인생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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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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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모음집인 이 책은 사실 좀 지루한데, 위대한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나 잡글들이 대체로 그러한 것과 같다. 익히 알려져있다시피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고, 이 에세이집의 대부분은 그가 청춘을 보낸 나라 알제리, 그 중에서도 오랑과 티파사 두 도시와 그 인근에 집중하고 있다.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한 번도 발을 들여 보지 못한 나같은 독자는, 카뮈가 그토록 예찬하는 지중해의 물결, 북아프리카의 태양, 건조한 바람과 나부끼는 올리브나무 이파리들, 모랫빛 도시를 채운 열정적인 젊은이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에 공감이 매우 어렵다. 역시 책은 아는 만큼 읽힌다.

다만 이 책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카뮈가 얼마나 유럽인인가 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 뿌리를 둔 알베르 카뮈의 작가적 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소기의 성과다. 예를 들어 아이스킬로스를 이야기하며 카뮈는,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빈약한 무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 다시 말해 눈부시다 못해서 판독하기 어려운 어떤 의미다. (중략) 우리는 빛이 우리 등 뒤에 있고,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맺은 인연들을 끊어내며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죽기 전에 완수해야 할 우리의 책무는 모든 단어들을 동원하여 그것에 이름을 붙이려 노력하는 것임을 배웠다. 예술가들은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라면 작품마다 진실에 가까워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언젠가는 모두가 찾아와 불타오를, 숨어있는 태양의 중심에서 좀 더 가까이 맴돌 것이다. 보잘것없는 예 술가라면 작품마다 진실에서 멀어지고,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빛도 흐트러진다. (158-159쪽)

같은 서술을 통해 그의 작가상을 명확히 한다. 요즘 독서모임마다 출몰하는 유령들 - 해석의 불가능성 운운하며 다른 사람의 해석을 막고 분위기를 망치는 자들을 보며 답답해 하다가 '발견하는 것은 무의미가 아니라 수수께끼' 라는 카뮈의 아름다운 문장을 보고 사이다 마신 듯 가슴이 뻥 뚫렸다.

인간이란 이름에 걸맞는 인간들은 생의 끝에 다 다르면 이 정면대결로 돌아와 이제 곧 자기 것이라고 믿었던 몇몇 생각 따위는 부정해 버리고 스스로의 운명과 맞섰던 고대인들의 빛나던 순수와 진실을 되찾아야만 한다고 확신(35-36쪽) 하는 카뮈에게는 모호함 앞에 등을 돌리고 허무주의 쪽으로 걸어가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무제한으로 사랑할 권리를 주장하는 자였다. 세계를 사랑했고 인간을 사랑했으며 육체의 현존을 사랑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정신의 미덕을 믿었다. 요컨대 그는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았고 이 에세이집에는 온통 찬탄이 넘쳐나, 그의 강렬한 긍정적, 의지적 에너지에 읽는 나도 저절로 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읽는 이의 피를 뜨겁게 만드는 작가이며, 어쩌면 그 뜨거움이 그가 북아프리카에서 받은 최대의 수혜인지도 모른다.이 책에서 카뮈는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 하지 않는 것이다(55쪽)' 라고 일갈하며, '아무것에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오직 현재만을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유일한 진실로서 간주해야 (72쪽)'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진정한 유럽인 - 그리스를 예찬하며 인간의 가치와 세계의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자였지만, 그것이 쉽게 전쟁 전의 물질주의나 전쟁 후의 허무주의로 물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아프리카의 뜨거운 피 때문이다.

세계는 아름답고, 세계를 떠나서는 구원이란 없으며, 태양이 데운 돌과 우뚝 선 실편백나무에서 '옳다'는 말이 의미 있어지는 유일한 세계를(74쪽) 상상한 작가. 그는 인간과 세계 어느 한 쪽도 부정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양팔에 가득 끌어안은 작가였다. '인간은 돌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돌을 파괴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저 자리를 바꾸는 것 뿐이지만 사물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 인간의 일이니 그것을 하는지 아무것도 안 하는지 선택해야 한다(107쪽)'는 말과 '우리는 모순을 앓고 있지만 모순을 거부해야 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 응당 할 일을 해야 한다(118쪽)'는 격앙된 말에서 나는 굴러떨어지는 돌을 기어이 밀어올리려는 시지프스의 힘, 주어진 운명에 반항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를 본다. 그는 유럽인으로서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알제리 태생인으로서 알제리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는 모순을 가졌다. 모순은 생의 조건이었고 중요한 것은 그가 선택한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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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계영 옮김 / 레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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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냥 잡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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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여름 - 태양, 입맞춤, 압생트 향… 청년 카뮈의 찬란한 감성
알베르 카뮈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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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는데 가령 죄란 단어가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들이 삶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삶을 거스르는 죄라는 건, 아마도 삶에 몹시 절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삶을 바라고 현생의 준엄한 위대함을 회피하는것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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