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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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느 매거진에서 (아마도 채널예스였던가) 정세랑 작가의 인터뷰를 보고 이 사람 괜찮네, 싶어 구매했다. 청소년 소설처럼 깜찍한 표지인데, 내용도 깜찍하다. 


첫 소설 '웨딩드레스 44'는 웹소설 시대에 맞네, 깜찍하다, 싶었고 두번째 소설 '효진'은 흔한 느낌 있었고 살짝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 정도면 역시 귀여운 범주에 넣어줄 수 있었다. 흥미가 돋기 시작한 건 세번째 소설 '알다시피, 은열' 부터였다. '은열'이라는 역사 속 인물을 조사하는 역사학과 대학원생의 글로벌한 동아시아 연합 밴드의 활동 내용이었는데, 꽤 괜찮았다. 경계를 가볍게 넘어다니는 젊고 발랄한 애들 이야기가 보기 좋았고 질척해지지도 암울해지지도 않는 마무리가 산뜻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소설 하나를 뽑으라면 네 번째 소설 '보늬'겠다. 언니 보늬의 돌연사 이후 돌연사.net을 만들고, 언니철머 갑자기 죽음을 맞은 사람들을 우주의 별처럼 인터넷 공간에 띄워놓는 작업을 하게 된 동생 보윤과 그들의 친구 규진, 매지의 이야기다. 인물들에 대한 이상화가 없었고, 역시 위에 적은 질척함과 암울함 대신 솔직함과 발랄함이 과장되지 않게 칠해져 있어 매력적이었다. '개인적 비극을 딛고 일어난 젊은이들이 사회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멋진 작업을 해냈'으며 '뿌리 깊은 착취의 구조를 점선으로나마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고' 보이고, '요새 젊은이들은 그저 무기력하다는 윗세대의 오해를 풀 때가 되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좋은 소설이었다.(보라색은 작중에서 돌연사.net을 취재한 기자의 기사를 인용) 이것은 작가가 인물의 입을 빌어 '개떡같이 말했지만 찰떡같이 받아' 해석한 독자-나의 평과도 일치한다.


장르문학 작가 출신임을 입증하는 듯한 '옥상에서 만나요', '영원히 77사이즈'나 '해피 쿠키 이어'도 나쁘지 않았고 역사학도 출신임을 반영하는 듯한 '이마와 모래'도 좋았다. 이 모든 게 다 프레임인 건 알지만, 어쨌거나 한국작가와 한국소설의 저변이 어둡고 칙칙하고 희망도 대안도 의지도 없는 구질구질의 경계를 허물고 범위를 넓혀가는 걸 보는 일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짧고 가벼운 터치로 씌어진 문장들, 인물이 직접 말하는 것 같은 구어체의 활용은 문학이 생동하는 일상의 영역 깊숙이 들어왔음을, 또 인터넷과 sns 세대의 세상 안에 확고히 맞물리게 되었음을 느끼게 했다. 꾸미지 않은 단순한 말들 속에 오늘의 사회와 인간들에 대한 응시와 고민이 무겁지 않게, 하지만 분명히 진지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 같은 '옥상에서 만나요'의 성취는 오늘의 한국문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도 같다. 참신한 소재도 좋고 인물들의 굽히지 않는 꿋꿋함과 공동체적 연대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도 든든하다. 앞으로 주목할만 한 작가가 한 명 늘었다 싶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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