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의 세계
듀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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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지는 사랑스럽지만 내용은 사랑스럽지 않은 책, 듀나의 '민트의 세계'를 읽었다. 배스킨라빈스 민트 초콜릿 칩 같은 달콤하고 향기로운 소설을 기대한다면 책의 시작부터 '덕트 안에서 불타버린 여고생의 시체'에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여고생은 얼굴도 몸통도 불타 알아볼 수 없지만 오른손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쉽게 신원을 알 수 있는 사람이다. 하긴 오른손이 불타 없어졌다고 해도 신체의 DNA 정보만 있으면 쉽게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이 시대는 2050년이기 때문이다.

2050년은 어떤 시대인가. 초능력자들의 세상이다. 초능력자라는 말이 더 이상 사용되지조차 않을 만큼 초능력자들이 흔해진 시대이다. 2026년 전주에서 최초의 '배터리 인간'이 등장한 후로, 인간의 내부에 감춰져 있던 갖가지 초능력들이 '배터리'의 힘을 받아 깨어난다. 초능력의 종류는 다양하다. 타인의 정신과 접속해 그것을 조종할 수 있는 정신감응자, 물건을 움직이는 염동력자, 하늘을 나는 비행능력자 등 여러 종류가 있고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능력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복합능력자'가 되기도 한다. 많은 인간들이 선천적으로 초능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건 우물 없는 두레박 같은 것, 배터리 없는 전자기기처럼 아무 쓸모도 없이 그저 내재되어 있는 장치일 뿐이었다. 그러나 '능력자'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배터리 인간'이 태어나고 와이파이처럼 존재만으로도 주위에 에너지를 주는 이 배터리들 때문에 세상은 깨어난 초능력자들이 가득한 곳이 된다. 당연히,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고자 한다. 이에 LK 그룹을 위시한 거대 기업들은 초능력과 배터리를 연구하며 능력자들을 특수 학교에 넣어 체계적, 전문적으로 교육시켜 나라의 심장부를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2050년의 세상이다.

 책의 뒷편에는 '전 인류가 초능력을 갖게 된 2049년' 이라는 배명훈 작가의 추천사가 적혀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2050년이라고 쓰는 것은, 이 책은 두 개의 시간축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것을 작가가 교묘히 감추고 있기 때문에 - 감췄다기 보다는 그냥 말을 하지 않은 거지만, 작품의 후반부에서 독자는 지금껏 하나의 시간 위에 굴러가는 두 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두 개의 다른 시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둘 다 2049년 10월 25일부터 26일까지의 24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아니라, 능력자-배터리 연합 팩(무리)인 민트 갱과 그들이 일으키는 LK 대전투가 2049년 10월 25~26일간의 이야기이며, 불타버린 시체의 신원이 LK 특수학교를 탈출한 복합능력자 소녀 류수현임을 알게 된 형사 한상우가 미스테리 속으로 빠져 '나는 누구이고 이 사건은 무엇인가' 의 질문 속을 헤매게 되는 이야기는 그로부터 약 1년 후의 이야기임을, 독자는 책이 거의 끝나갈 때쯤 알게 된다. 나만 그런가? 나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일찌감치 눈치 챘을지도.

 이렇게 미리 적어놓으면 스포일링이 아닌가 하겠지만, 이 이야기의 재미라는 게 '두 개의 시간축을 놓고 전개되는 것이었다!' 가 전부가 아니므로, 쓰는 데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듀나는 좋은 SF 소설이 갖춰야 할 두 가지 조건, 첫째 '시간'을 염두에 둘 것과, 둘째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 둘 모두를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소설의 진짜 재미는 후자에 있기 때문이다. 즉 '민트의 세계'는 그야말로 정교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2018년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과 전국의 주요 도시들을 배경 삼아 그것을 눈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활용하는데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인간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2049~2050년의 신인간이며 이들이 펼쳐 보이는 활동들은 지금의 우리가 감히 꿈꿀 수 없는 적극적 환타지다. 이 두 가지의 부조화스러운 충돌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도리어 독자를 매혹시킨다. 익숙한 공간을 완전히 뒤흔드는 새로운 인간상의 출현. 그로 인해 붕괴되는 '익숙함'의 느낌. 내 눈앞에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이는 '자명한 세계' 에 대한 의심은 이 사랑스러운 책 '민트의 세계'로 인해 촉발된 '새로운 세계'이다.  

 분량이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나오고 (2050년 서울은 코스모폴리탄들의 대도시이므로 당연히 전세계의 다양한 국적, 다양한 인물들이 뒤섞여 있다) 많은 지명과 가공의 사건명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 독자를 어지럽게 하지만, 그 어지러움 마저도 새로운 세계에서 타는 롤러코스터의 짜릿함으로 느껴진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라. 초능력을 갖춘 신인간이라고 해도 그들의 나약한 정신 세계는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억의 형태를 가진 마약'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몽마' - 인간의 미련과 집착적 회상의 표상물 같은 이 괴물이 자라나 '유령'이 되고 결국 사회의 주요 인간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렇고, 제멋대로 조작하고 기워붙인 정보-기억들이 또한 스스로 '유령'이 되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사실 2049년의 초능력자들도 2018년의 우리와 별다를 바 없기도 하니까. 당신의 롤러 코스터는 그다지 낯선 것만은 아닐 것이다.




-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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